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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텅 빈 방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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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은 Jun 29. 2022

흐르는 시간과 마주하며

- 베를린, 폴란드 일기 5

‘인발리덴 공원(Invaliden Park)’은 물에 잠긴 나침반 형태의 구조물로 사람을 맞는다. 얕은 물은 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 물에 뛰어드는 대형견을 보면서 첫째와 통화했다.

“이제 첫 번째 일정을 시작하려고.”

“난 조금 있으면 퇴근인데.”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 걸었다.

“엄마, 여긴 오전 9시. 우린 별일없어.”

“응, 전화 고마워.”

“후딱 끊지 마. 이미 요금을 내고 왔으니까. 알았지?”

예전에 국제 전화를 하면 요금 많이 나온다고 “별일없다.” 하고 툭 끊는 일이 많았다. 유심칩을 바꾸는 형식으로 사용한 적도 있는데, 통화와 문자를 할 수 없어서 어떤 부분은 불편했다. 그래서 국외 로밍 방식을 선택했고, 여행 내내 가족들과 통화하고, 문자를 받았고, 심지어 자꾸 내게 대학원 등록금을 내라는 잘못 보내온 문자에 연락처가 잘못 적힌 것 같다고 알릴 수 있었다. 

   

공원 뒤쪽에 있는, 목적지인 인발리덴 (Invaliden) 묘지에 도착했다. 어떤 무덤에는 철십자가, 또 어떤 곳에는 거대한 조각상과 함께 가족들이 묻혀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전쟁에 나갔다가 죽은 이들도 있었다.

이 묘지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묻혀 있었다. 이 사람을 암살하기 위해 영국군이 체코로 특파되고, 라인하르트가 암살되고, 암살에 동참한 사람 중 한 명이 배신하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두 사람이 체코 키릴 성당 지하에서 물에 잠겨들다가 꼭 껴안고 마지막으로 서로를 겨누며 죽었다. 배신자는 전쟁이 끝난 뒤 처벌받았다. 영화 ‘새벽의 7인’에서 이를 재연했다.

루이스 길버트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1975년에 만든 것인데, 청소년 시기에 이 영화를 보고 마지막 장면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대리이자 국가보안본부의 수장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도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가 암살당하자 히틀러는 체코에서 베를린까지 시신을 가져와 이곳, ‘인발리덴’ 묘지에 묻었다. 하켄크로이츠가 콱 박힌 철십자가, 벽감을 붉은 벽돌로 마감한 커다란 무덤을 조성했다.

전쟁이 끝나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무덤은 파헤쳐졌지만 시신은 훼손되지 않았다. 

   

인발리덴 묘지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그 무덤은 찾지 못했다. 전범의 무덤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뺐을 수도 있겠다. 비슷한 벽감도 못 찾았다.

묘지는 산책하듯 들어갔다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비어 있는, 형태가 달라진 곳들을 눈으로 보면서 예전에 이곳을 차지했던 이들이 저지른 만행들을 기억한다.

묘지 한가운데 무성하게 보라색 잎을 뻗은 나무가 인상 깊었다.

‘베를린의 전승기념탑’(Berliner Siegessäule – 베를리너 지게스조일레)은 티어가르텐 공원 근처에 있다. 교차로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이곳으로 접근하려면 지하도로 걸어가야 한다. 지하도로 들어가는 통로 가운데 화장실이 가까운 곳도 있다.

프로이센이 덴마크ㆍ프랑스ㆍ오스트리아 등과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하여 만들었고, 국가의회 의사당 앞에 있었다. 히틀러가 이곳으로 옮겼다. 옮기는 과정에서 기단을 더해 더 높아졌고, 꼭대기 전망대까지 층계로 올라갈 수 있다. 

전망대까지 들어가기 전에 요금을 지불하면, 전승기념탑 역사와 여러 나라의 기념물들을 모형으로 만든 전시관을 둘러볼 수 있다. 


층계로 올라가다가 몇 번 층계참을 만난다. 그곳에 작은 의자가 놓여 잠깐 다리쉼을 할 수 있다. 의자는 층계 난간과 연결된 다리받침에 나무판을 연결한 형태인데, 두 명이 앉을 수 있다가, 조금 더 올라가면 한 명만 앉을 수 있고, 막바지에 다다르면 층계참에도 의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전망대에 다다르면 베를린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독에서 만든 TV 타워도 그렇지만, 이곳 지게스조일레도 전망이 좋다. 특히 전승기념탑이 사거리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등장했던 탑이 바로 이곳이다. 

    

다리품을 팔아 올라온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베를린을 구경한다. 우리가 지나온 길과 앞으로 가볼 곳들이 펼쳐진다. 

한눈에 들어오는 이 도시가 한때 장벽으로 나뉘어 그 너머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뻥 뚫려 있다.

전승기념탑 근처에는 비스마르크, 론, 몰트게의 동상도 있다. 

    

‘사진박물관(Museum für Fotografie)’은 헬뮤트 뉴튼이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 헬뮤트는 유대인 사진 작가로 싱가포르로 이주, 이후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사진 작업을 한다. 외설과 예술 사이를 오가며 노출이 심한 사진들을 찍었고, 유명 배우들도 카메라에 담았다.

주름진 얼굴로 당당하지만 못마땅한 듯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크린트 이스트우드, 앵무새와 함께 찍은 엘리자베스 테일러, 믹 재거 등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패션 모델들을 찍은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들어서자마자 층계에 전시된 커다란 사진 세 점이 이 박물관을 잘 드러낸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줄 테니 잘 봐, 이렇게 선언한다.


신 국립미술관에서는 뜻밖에 데이비드 호크니를 만났다. 같은 장소에서 봄, 여름, 가을, 가을을 담은 네 점 가운데 겨울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잎사귀를 떨군 커다란 나무와 달리 배경에는 아직 색이 살아 있는 자연이 펼쳐지고, 다시 봄이 다가오리라는 기대가 물씬 풍겨나는 그림이었다. 호크니는 캔버스 여러 개를 붙여서 작업하곤 하는데, 이 작품들도 그랬다. 

나는 이 네 점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사진으로 찍어서 간직하기엔 그림이 주는 울림을 다 담을 수 없어서, 눈으로 담았다.

신 국립미술관에서 만난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피터 브뤼겔의 원작 몇 점도 마음에 들었다.

프린트된 상태로 본 그림을 원화로 보면 그림으로 빨려든다. 작은 부분도 놓치기 싫어서 보고 또 본다. 한 화폭에 다양한 장면을 배치해서 많은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브뤼겔과 마주하며, 이 그림을 보는 행운에 감사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걷다 보면 빨리 피곤해진다. 계속 걷는 게 아니라 걷다가 멈추고, 다시 걷다가 멈추고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들어갈 때 받은 지도와 꼭 봐야 할 그림들을 짚으며 다녔지만, 나가기 전에 다시 데이비드 호크니와 마주했다. 

“안녕, 호크니!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가 그린 그림들을 만난 행운은 여행 내내 힘을 주었다. 

앞으로 나는 한 자리에서 변하는 시간을 바라볼 수 있겠지만, 그 변화를 잘 알아차릴 수 있게 감각을 열어야겠다. 남들이 어떻게 살든, 나는 내 길을 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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