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를린, 폴란드 일기 3
앞 이야기를 읽은 분들이 이런 일정을 자신은 할 수 없겠다고 걱정했다. 자유여행을 할 때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가족들과 함께 여행할 때, 기차를 갈아타고 로마로 가야 했다. 그런데 선로는 여러 곳이고, 안내 방송은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흘러나왔고,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창구로 올라왔는데 창구 직원이 정말 태연하게 “방금 떠나는 그 열차다.”라고 대답했다. 눈앞에서 기차를 놓쳤고, 다른 기차로 바꿔 타야 했던 우리는 플랫폼에서 오래 기다렸다가 야간 기차를 타고 로마로 들어갔다. 그날 일정을 모두 날릴 정도로 피곤했다.
언어가 다르고 나는 다른 시스템에서 살았기 때문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의외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사실을 미리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에서 돌발 상황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고, 그 돌발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도 삶이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바르샤바에서 비엔나, 다시 베를린으로 움직였다. 이때는 오스트리아 항공을 이용했고, 기내에서 작은 동전 초콜릿을 하나씩 받았다.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안내 데스크로 갔다. 이때부터 모든 의사 소통은 영어로 해야 한다. 능숙하지는 않지만, 기본 단어를 몇 개 섞어서 사용하다가 막히면 번역 앱을 돌리면 된다.
“9유로 티켓을 구입하고 싶습니다.”
2022년, 독일은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 동안 정부에서 교통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9유로 티켓은 S,U반,버스,트램 뿐만 아니라 RE,RB(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호 같은) 준등급 기차에도 사용가능하고, 독일 전역 어디든 사용 가능하다. 그렇지만 RE, RB 열차 중 일부 안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어떤 여행자는 베를린에서 이 티켓으로 포츠담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우리가 베를린에서 산 9유로 티켓으로 드레스덴에서도 트램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9유로 티켓은 한 달 동안 쓸 수 있다.
몇 년 전에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는 한국에서 ‘Welcome ticket’을 미리 예약했고, 베를린 중앙역 안내 데스크에서 찾았다. 기간에 따라 3일, 7일을 쓸 수 있는 이 티켓으로 베를린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번에 9유로 티켓 정책이 나오면서 더 싼 가격으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9유로 티켓을 두 장 구입한 다음, 박물관 티켓도 끊었다. 박물관 티켓은 3일 동안 베를린 시내 박물관을 볼 수 있는데 사립 박물관에는 해당하지 않는 곳도 있으니 잘 확인해야 한다. 안내 데스크 직원은 박물관 티켓으로 꼭 가야 하는 곳 몇 군데를 표시한 전단지를 챙겨주었다.
9유로 티켓을 이용해서 시내까지 접근한 다음, 호텔에 캐리어를 놓고 간단한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가장 먼저 ‘그루네발트 17번 선로’(Grunewald Gleis 17)로 갔다. 이곳은 당시 유대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차로 실어 수용소로 보내던 기차역 선로 중 한 곳을 보존하고, 선로 양쪽에 어느 날짜에 몇 명이 어느 곳으로 떠났는지를 기념물로 남겨놓았다.
‘그루네발트’ 역에 내리면 17번 선로로 가는 두 가지 경로와 만난다. ‘Gleis 17’이라는 팻말이 붙은 바깥으로 나가는 층계, 밖으로 아예 나가서 접근하는 방법이 있다. 그루네발트 역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두 가지 있는데, 선로와 역 바깥 두 곳에 있다.
우리는 역 바깥으로 나갔다. 역 바깥에 있는 기념물은 벽에 붙은 부조로서 벽을 파낸 형태처럼 만들었다. 그들은 모두 한 곳을 향해 걸어간다. 비틀거리며, 휘청거리며. 그들이 걷는 방향은 모두 17번 선로로 이어진다.
17번 선로는 현재 사용하지 않는다. 당시 독일제국철도가 그루네발트, 안할터, 모하비트 화물역 등에서 특별열차를 운영하면서 베를린의 유대인들을 실어날랐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해 17번 선로를 닫고 그곳에서 끌려간 흔적을 남겨두었다.
선로 양쪽으로 어떤 날에 유대인 몇 명이 베를린에서 다른 곳으로 끌려갔는지를 남겨두었다. 이 철판은 무려 186개이며, 마지막 강철판 세 개에는 비어 있다. 이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강제 수송을 위해 남겨둔 것이다.
어떤 곳에는 희생자 이름이 강철판 빈 곳에 박혀 있다. 누군가 그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참혹한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새긴 것이다.
유럽 곳곳에서 유대인들이 끌려갔다. 심지어 노르웨이에서도 수송되었다고 한다. 일반 열차가 아닌 화물 열차에 짐처럼 실려서...
하켄크로이츠(갈고리 십자가) 휘장을 휘두르던 나치는 유럽 곳곳을 피로 물들였다. 독일은 이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곳곳에 기념물을 설치했고, 후손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찾아간 6월은 학생들의 수학여행 기간이었다. 학생들을 데리고 온 선생님은 아이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진지하게 그 역사를 이야기한다. 이런 광경을 수년 전 다하우 수용소를 갔을 때도 발견했다.
잊지 않고 남겨두려는 노력, 그래서 다시 그런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에 우리도 베를린을 찾았다. 가장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 그리고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던 흔적들을 간직한 곳. 어쩌면 우리가 아직 분단된 나라이기 때문에 더 마음이 갔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Kaiser-Wilhelm-Gedächtnis-Kirche / Kaiser Wilhelm Memorial Church)는 초 역에서 걸어갈 수 있다. 초 역에 내리면 사거리에서 교회 첨탑을 볼 수 있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전쟁 중에 크게 부서졌다.
독일 전역에는 이렇게 부서진 건물이나 마을을 잘 복원해서 예전 모습으로 돌려놓은 곳이 많다. 밤베르크나 뉘른베르크가 그렇다. 그곳에 들렀을 때 이곳이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던 마을이라고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옛 도시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복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서진 채로 두었고,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남겼다. 안으로 들어가면 천장에 있던 깨진 벽화를 이어 붙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외벽에도 총탄 흔적이 남아 있고, 첨탑도 부서진 채 더 이상 허물어지지 않도록 공사를 한 상태다.
바로 그 옆에 신 교회가 있고, 그 앞에는 몇 년 전 크리스마스 폭탄 테러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 층계에 새겨져 있다.
신교회는 유리 블록으로 외벽을 만들었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푸른 빛으로 둘러싸인 교회를 마주한다. 그리고 정면에 위치한 십자가를 발견한다.
독일은 개신교를 믿는데, 특이하게 십자가 형태는 카톨릭처럼 예수가 함께 있다. 이것은 독일의 다른 교회에서도 비슷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에서는 십자가만 사용하지, 그곳에 예수를 함께 표현하지 않는다.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푸른 빛이 쏟아지는 교회에서 밀려드는 슬픔과 마주했다.
이 교회에는 두 번째 방문이다.
처음 왔을 때는 신기하고 좋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푸른 빛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동시에 떠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빛이면서 어둠인, 어둠은 반드시 물러나고 빛이 온다는 그 문구가 나를 감쌌다.
나는 곳곳에서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 가족을 포함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덜 아프고, 행복하길 바랐다.
아프지 말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
“사는 동안, 좋은 경험을 더 많이 할 수 있기를!”
그 진심을 담았다.
어떤 곳에서는 초를 밝혔고, 가끔 묵주기도를 했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에서도 기도했다. 이곳에서 올린 기도가 바다를 건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때로는 긴 한숨밖에 우리 옆에 남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가족이 떠난 텅 빈 방을 평생 바라보면서 살아갔을 사람들이 내뿜었을 한숨을 차마 안다고 쓸 수 없다. 어떤 고통이라고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전쟁이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도시 한 복판에 그대로 남겨둔 베를린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과연, 이런 흔적을 남겨둘 자신이 있을까.
우리가 어떤 잘못을 했고, 그 잘못을 수정할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을 각오를 다질 기념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무너진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그 희생자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세월호 참사는 또 어떤가.
긴 한숨과 함께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