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텅 빈 방 02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하은 Jun 24. 2022

세상에 순탄한 길은 없었다.

- 베를린/ 폴란드 일기 2

한 사람이 하루를 사는 데 어떤 물건이 얼마나 필요할까? 유럽 여행에는 어떤 숙소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짐이 달라진다. 호스텔이나 민박을 이용하면 개인용 침대 시트가 필요할 때가 있다. 수건을 별도로 가져가야 할 수 있고, 세탁을 할 수 있는 숙소로 간다면 옷을 몇 벌만 챙겨가면 된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는 호텔로만 숙소를 정했고, 세탁을 포기했다. 이틀 이상 묵는 숙소에서는 양말과 속옷 정도만 빨아 널었다가(하루 만에 안 마를 수 있으니 다음날 숙소를 옮겨야 하는 곳에서는 불가능하다) 옷장에 널어두고 밖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여행 막바지부터는 짐을 줄여야 한다. 어떤 여행이든 기념품이나 책 등을 사면 갈 때보다 돌아올 때 짐 무게가 늘어나게 마련이므로 짐을 쌀 때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속옷에도 여행 막바지에 버릴 수 있는 것들을 넣고, 잘 때 입는 옷도 마찬가지로 버리고 올 수 있는 것들로 쌌다. 저녁을 즉석식 밥으로 해결하기 위해 접이식 포트도 준비했다. 여행에 필요한 책들과 시간이 날 때 읽을 책, 노트북과 저장장치, 충전용 포트와 옷, 화장품, 비상약 등을 챙겼다.

위도가 한국보다 높은 곳으로 가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쌀쌀할 수 있고, 낮기온은 높아서 반소매와 긴소매 옷을 섞었고, 얇은 스카프 한 장을 따로 챙겼다. 점퍼와 카디건, 모자 등을 싸고 나니 벌써 한 짐이었다.

섬유 탈취제(방 안에 음식 냄새 없애는 용도)와 작은 스프레이(구겨진 옷을 펴기 위한 용도)도 챙겼다.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폰, 보조배터리도 챙겼다.


처음 탈 비행기는 바르샤바에서 갈아타고 베를린까지 간다. 베를린은 아직 직항이 없어서 갈아타야 한다.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는 동안, 국제선은 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내렸다. 베를린에는 테겔과 쇠네펠트 공항이 있었고, 쇠네펠트 공항 부지를 더 넓혀서 브란덴부르트 공항이 생겼다. 몇 년 전에 동네 친구들과 함께 독일로 여행을 왔을 때는 없던 ‘브란덴부르크 공항’에 내렸다. 베를린은 아직 한국에서 직항으로 오갈 수 없고, 어디든 경유해야 한다. 그때 경유하는 비행기 국적이 어디냐에 따라 경유지가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도 베를린에 직항을 만들 계획이라고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팬데믹이 길어지고 항공 인력이 대폭 축소되는 등 변화가 생기면서 아직 직항은 없다. 


우리가 출발하던 때, 인천 공항에도 문을 닫은 가게들이 여럿이었다. 면세점뿐만 아니라 식당가도 아예 장사를 접은 듯한 곳이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 베를린으로 직항이 생길 수 있겠지만 현재는 어딘가를 경유해야 한다.

폴란드 항공사인 LOT는 바르샤바에서 갈아타는 경로를 택한다. 우리가 돌아올 도시도 바르샤바이므로 LOT를 선택했다. 물론 비행기값을 가장 먼저 고려했다.

되도록 작은 비용으로 더 많이 보고 올 작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여행자 보험까지 든 다음, 허리가 약간 아팠던 나는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고 치과에서 스케일링도 했다.     


오전 8시 30분 비행기를 타려면 새벽에 출발해야 한다. 일찍 자려고 누웠던 나는 갑작스러운 문자를 받았다.

항공사에서 비행기가 연착된다는 문자였다. 늦게 일어나도 괜찮다는 뜻이지만, 우리처럼 갈아타는 승객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LOT 별명이 뭔지 알아?”

“뭔데?”

“Late of Tomorrow 래.”

“맙소사!”     

최근 들어 연착이 잦아서 바르샤바에서 자고 다음날 출발하는 승객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공기 값이 워낙 싸서 이 항공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반려가 다음 비행기를 타야 하는 우리 상황을 메일로 보냈고, 첫째는 바르샤바 LOT로 국제 전화를 걸어서 다음 항공편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비슷한 경우를 검색했다.


어쨌든 공항에 도착해서 직원에게 문의했더니, 원칙적으로는 제 시간에 출발하기 때문에 그 다음 상황은 바르샤바에 도착해서 해결하라고 했다.

창구 직원은 자신처럼 빨간 스카프를 한 직원이 나와 있을 것이니 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비행기에 올라타자 황당한 일이 또 있었다.

출발 전에 좋은 자리로 바꾸겠느냐는 권고 메일을 몇 번 받았는데 그 좋은 자리가 다름 아닌 ‘같이 앉을 수 있는 자리’ 혹은 ‘통로’ 자리였다. 그래서 반려와 나는 나란히 앉지 못하고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내 옆자리에 앉은 분은 신혼여행을 떠나는 중이었는데, 신랑은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 너무 떨어져서 찾기 힘들다고 했다. 


어쨌든 비행기는 한국을 떠났다.

자리마다 있는 작은 스크린으로 비행기가 지나는 방향과 나아갈 바를 3D 지도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인천을 출발한 비행기는 곧 백령도 근처를 지났다. 지도에는 북한 지명이 몇 개 떴다.



 원래 이 비행기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하늘을 지나가는데, 지금 두 나라가 전쟁 중이기 때문에 빙 돌아가는 항로를 선택했다. 그래서 비행 시간이 더 걸렸다.

13시간 만에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바르샤바에 최종 도착하는 사람들은 짐을 찾으러 떠났고, 우리처럼 갈아타는 사람들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뛰었다. 바르샤바에서 갈아타는 최종 목적지는 아주 다양했다. 이탈리아, 스위스, 영국, 스페인 등 다양한 유럽의 나라와 도시로 떠날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서 연결편을 확인받았다. 긴 줄의 처음 부분에서는 연결편을 바로 받아서 떠났다. 그러나 중간 이후에 서 있던 우리는 상황이 달랐다.     

타야 했던 베를린행 비행기는 우리가 탄 비행기가 아직 하늘에 떠 있을 때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직원은 베를린으로 떠나는 비행기가 오늘은 없으니 하룻밤 자고 내일 떠나라며 택시와 호텔 바우처를 줬다.

우리 캐리어는 어떻게 하느냐고 하자, 지금 찾으러 가라고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캐리어는 수하물 찾는 곳에 없어서 따로 ‘baggage claim’을 하는 곳으로 찾아가 짐표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담당자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캐리어를 받을 수 있는 곳 숫자를 이야기했다.

그곳에서 우리처럼 비행기를 놓친 사람들을 만났다. 신혼여행을 자유여행으로 떠난다는 이들은 로마행 비행기를 놓쳤고, 엄마와 함께 여행 온 여자는 하염없이 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사이 베를린 호텔에 전화해서 이 상황을 설명하고 내일 아침에 체크인 한다고 알렸다. 


짐을 찾고 공항을 나가려는데, 이번에는 출국 심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폴란드 출국 심사는 조금 까다로운 편이다. 캐리어를 엑스레이 투시하자마자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내용물을 짚으며 일일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걸 또 대답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는데, 내일 아침 비행기로 다시 공항에 와야 하는데 불구하고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다. 

밤늦게 도착한 호텔에서는 다행히 저녁 식사를 뷔페로 먹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유럽에서 먹은 첫 끼였다. 딸기잼에 찍어 먹는다는 슈톨렌을 처음 먹었고, 긴 여행에 지쳐서 과일과 치즈로 간단하게 먹었다.   

  

세상에 순탄한 길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처럼 갈아타는 사람들에게 숙박비와 택시비를 다 내주면 뭐가 남겠느냐 하겠지만, 비행기는 빈 자리가 없었다. 가끔 연착이 되더라도 충분히 유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나중에 경험한 바지만 폴란드에서 기차와 버스, 트램이 제 시간에 도착하는 일이 드물었다. 여행자에게는 속 터지는 일이겠지만 폴란드 사람들은 웃었다. 예전에 내가 파리로 가는 기차가 연착되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전광판에 발을 동동 구르자 프랑스 사람들이 어깨를 으쓱 올렸던 것처럼.     


처음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 글을 의심한다. 더 적확한 표현이 있을 텐데 그걸 찾지 못해 두루뭉술하게 표현한 것은 아닌가, 이 정도면 됐다 싶어서 타협한 것은 아닌가, 비슷한 이야기를 쓴 뒤에 만족하는 것은 아닌가, 책 한 권 더 출간한 것에 뿌듯하기만 한가, 내 글이 부끄럽지 않은가, 글이 글로 끝나지 않도록 나는 또 무엇을 했는가. 


여행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생각한 일정은 우리 생각일 뿐이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다. 출발부터 그랬다. 그러니 뭐든 고쳐서, 수정하고, 다시 생각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내 글과 인생이 그랬듯이, 여행이라고 다를쏘냐!     


“일정이 꼬이겠네.”

“그래도 일찍 출발하니까…….”





다음날 탄 오스트리아 항공에서 바라본 LOT 항공기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오전 6시 50분에 비엔나로 떠나는 비행기를 탔고, 비엔나에서 다시 베를린으로 떠나는 9시 15분 비행기로 갈아탔다.

이틀 동안 인천 공항, 바르샤바 쇼팽 공항, 비엔나, 베를린까지 공항 네 군데를 거쳤다.

그리고 드디어 베를린에 도착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겼고, 많은 목숨이 스러졌으며, 그 가족들이 텅 빈 방을 경험하게 했던 2차 세계대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 닿았다.

이전 01화 텅 빈 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