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들의자 Oct 28. 2022

#17. 경자년(庚子年) 수치

(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직장 생존기  Vol.2

이 글은 소시오패스 직장상사 밑에서 오늘도 온갖 고초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직장인 분들에게 드리는 위로와 공감의 글이 아닌, 제 스스로가 겪은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대한 기록이자,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고 그들과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타산지석의 사료'임을 밝힙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에 유사함을 느낀다면, 당신 상사도 소시오패스 입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만, 일부 경험담에 기반했습니다.


인간은 화가 나면 보통 2가지 형태로 이를 해결한다. 밖으로 분출하거나, 안으로 삭이거나. 

조 상무는 과음을 한 다음날이면 화가 많다. 그리고 그 화를 언제나 밖으로 분출해 해소하는 타입으로 그 분풀이의 대상은 팀장들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여나 팀원 레벨의 구성원에게 화풀이를 했다가는 퇴사나 소원수리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Risk를 최소화하고자, 본인이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팀장과 직책자들이 언제나 조 상무의 먹잇감이 되곤 한다.




8월 중순 월요일 오전 10시 20분, 사업부 주간회의 (32층 컨퍼런스룸)  

"기획팀장님, 오늘 조 상무님 다른 일정 있으신가요? 아니면 20분이나 지나도 아직 안 오시는 거 보면 깜빡 잊으신 건 아닐까요?"


"아닙니다, 오전에 몸이 조금 불편하다고 늦게 출발하셨다는데 거의 다 오셨다고 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다른 팀장님들께도 대신 양해 말씀드립니다. 상무님 오시는 대로 주간회의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10여분이 더 흘러 빨갛게 술이 덜 깬 얼굴로 조 상무가 회의실에 나타났다. 지난 8개월 간 이런 날이면 그가 별거 아닌 일에도 불같이 화내는 장면을 숱하게 봐온 여러 팀장들은 일부러 시선을 외면하며 필요한 내용들만 간략하게 발표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브랜딩 Task 진행 이후, 7월 말 출시된 판타스틱 4 신제품은 전국 매장에 전시 완료되었습니다. 출시 후 2주 정도 지났지만, 일 매출은 목표 대비 40% 수준으로 계절적 비수기라 예상보다 부진한 성적입니다. 다만, 9월 이후 성수기에 접어들면 본격적으로 매출이 상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마케팅 팀장, 당신이 하는 일이 뭔가? 출시 후 2주가 지났는데 일 매출이 목표 대비 40% 수준이면 여기 수도권 영업팀장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대책 방안 같은 것들을 좀 전달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대체 당신이 하는 역할이 뭔데? 그냥 개발된 제품 전시장에 뿌리고, 영업팀에서 올라오는 매출 집계만 하는 게 당신일이면 다음부터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마!"


아직 술이 덜 깬 듯한 조 상무는 신제품 실적을 보고 중이던 마케팅 팀장을 시작으로 주간회의에 참석한 모든 팀장급 이상 리더들에게 독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여기 앉아 있는 당신들, 대체할 줄 아는 게 뭡니까? 현상만 내 앞에서 말하지 말고 원인과 대책을 가져오라고! 내가 이렇게 매출 목표 40%수준으로 미달하기 위해 미국 법인에서 들어온 줄 아나?

유통 사업은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조직의 리더 자리는 나한테 뺏겨, 실적은 경쟁사에 뺏겨, 당신들은 지금 있는 자리에서 꾸역꾸역 버티는 것 말고는 뺏기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인가?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시키는 거라도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니야! 개발 일정도 마케팅 플랜도 다 내가 지정해서 시켜야 진행이 되고, 지금은 새롭게 출시된 제품도 신제품 후광도 없이 계획 대비 반토막인데 내가 또 어떤 것을 당신들에게 시켜야 할까?"


조 상무를 제외하고 16명에 달하는 리더들은 조 상무가 30분 넘게 독설을 내뱉는 동안 그저 고개를 숙이고 분을 삭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안하무인식 조 상무의 독설에 팩트를 들이밀며 반박하거나, 반발의 의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일은 역시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1시간 가까이 매출 실적 저하부터 리더들의 무능함, 무능한 리더들로 인해 주요 보직은 다 해외에서 온 인사들에 뺏긴 것에 대한 비아냥, 그리고 시키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면 시키는 거라도 똑바로 하라는 폭언이 이어졌다. 


전날 과음으로 인해 쌓였던 화를 1시간 반 동안 다 분출해 낸 조 상무는 매출 120% 달성 계획을 당장 내일까지 가져오라는 지시를 남기고 회의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어서 같이 해장국을 먹어야 하는 기획팀장도 부리나케 따라나섰다. 


사업부장-기획팀장 세트가 나가고 난 뒤, 회의실에는 침묵만 흘렀다. 모멸감, 패배감,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컨퍼런스룸 안의 리더들은 누구 하나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짧은 외마디와 함께 유 차장님이 일어섰고, 이어서 나머지 참석자들도 하나둘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군가는 펜과 노트를 던지고, 짧은 욕설을 내 뱉는 등 각자 대상없는 분풀이를 하기도 했다. 


"유 차장님, 회사 생활 중 오늘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거 같아요. 제가 혹시나 회사를 떠나게 되면 오늘 폭언은 녹음본을 감사실에 투척하고 갈거에요. 중간부터 못 참겠어서 녹음했더니 50분쯤 녹음되어 있네요. 파일 제목은 '경자년 수치'로 해야겠어요 "




모든 리더들과 기획팀이 매주 가장 꺼려하는 주간회의가 끝났지만, 그날은 이후에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당장 내일이면 조 상무가 득달같이 매출 확보 방안을 내놓으라고 다그치겠지만, 다 같이 모욕당했다는 모멸감과 어느 누구도 반박하거나, 대항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일을 할 의욕이 온몸에서 빠져나간 상태였다. 


'밝아도 꿈틀거리지 못한다면, 그 다음엔 더 세게 밟힐 뿐이다.'라는 건 이후 조 상무의 폭언과 횡포가 더 심해짐을 겪으며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가만히 있다가 가마니 되느니, 터뜨릴 땐 터뜨려야 한다'는 걸 직장생활 9년 만에 뼛속 깊이 깨달았다. 



이전 에피소드가 궁금하다면:https://brunch.co.kr/brunchbook/sociopath


이미지 출처:Photo by Issy Bailey on Unsplash

      

이전 06화 #16. (곰)팡이제로 사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