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달한 마음으로 찍었어

by idle

제주에서 회사 생활을 하며 4년을 보냈다. 그때 한라산에도 둘레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라산에 둘레길이 생겼네, 언제 가볼까?”

그렇게 말만 하고 제주를 떠날 때까지 한 번을 가지 않았다. 여행이 아니라 산다는 건 그랬다. 언젠가 가겠지 하며 미루다가 뜻하지 않게 제주를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둘레길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있었다.


3월 제주의 봄날, 숲이 연두색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을 때 5.16 도로에 있는 숲 터널이 생각났다.

“지금 숲 터널 가면 연두색 터널이 되어 있을 거야.”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달리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도로 옆으로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들이 잔뜩 우거져 있고, 나무 사이로 한라산의 속살을 엿볼 수 있었다. 이끼 낀 검은 돌들이 바닥에 널려있고, 그 위로는 나무들이 불안한 자태로 자라고 있다. 가끔은 노루 한 마리가 도로 가로 나와서 갓 자라난 여린 잎을 먹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때 한라산 둘레길을 떠올렸다.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도로를 지나면서 살짝 보이던 한라산의 본모습을 좀 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거다. 다시 제주에서 두 달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한라산 둘레길 한 바퀴를 돌아보기로 했다.


2011년 4월, 한라산에 처음으로 생긴 둘레길은 ‘동백길’이다. 무오법정사에서 돈내코까지 이어지는 11.3km의 코스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고 서귀포로 향했다. 동백길의 끝 지점에 차를 주차하고, 다시 택시를 불러 시작 지점인 무오법정사로 이동했다. 동백길에 들어서자, 양 옆으로 키 큰 동백나무가 붉은 꽃을 피우고 서있었다. 바닥에는 꽃송이 채로 떨어진 동백꽃들이 흩어져 있었고, 동백나무 사이로 연두색 나뭇잎이 가득 채워진 단풍나무가 있어 지금이 봄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한참 길을 걷다 누군가 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 둔 것이 보였다.


“누군지 몰라도 참 달달한 사람이네.”

“그러게, 그러고 보니 당신은 나한테 한 번도 달달한 말을 한 적이 없는 거 같아.”

“네가 달달한 거 찍는 동안, 난 달달한 마음으로 너를 찍었어.”


남편은 늘 그랬다. 달달한 말은 하지 않지만, 그 어떤 말보다 달달하게 느껴지는 말을 툭 던지고는 한다. 내가 그 말이 좋았어 라고 얘기하면 자기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나 혼자 해석해서 달달하게 느끼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은 있다.


남편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난 힘든걸 잘 티 내지 않는 편이다. 길을 걷다가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파도, 그 길을 다 걸을 때까지 참으며 내색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곧 힘들어질 때라는 걸 알고 있다.


“빨리 식당을 찾아야 하는데.”

“왜? 나 배 안 고파.”

“아니야. 지금 위태위태한 상태야, 곧 배고파서 식은땀을 흘릴걸.”


난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남편이 이런 말을 하면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허기를 느꼈다. 내가 정신적으로 어떤 스트레스를 받을지, 몸이 어떤 상태인지 나를 옆에서 지켜보며 챙겨준다. 남편이 그렇게 챙겨줄 때 그 어떤 달달한 말 보다 더 사랑받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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