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4년 전, 14살로 돌아간다. 14살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아 힘겹게 1998년부터 손가락으로 세월을 헤아려보았다.
초등학교 6학년, 그 때에는 내 인생 아주 큰 사건일 것만 같았던 일을 당하고, 힘도 열정도 잃어버린 채 허송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국어 선생님이 교재가 아닌 두꺼운 소설 책 한 권을 가지고 들어왔다. 더글라스 케네디 작가의 <빅 픽처>.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이니,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쯤 읽어보라는 선생님의 짧은 코멘트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처럼 초점 없는 눈동자로 시간을 버리고 있는 아이들의 집중력을 잠시나마 환기하기 위한 소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4살의 나는 그것을 그저 흘러가는 것으로 놔두지 않았다.
피를 칠갑한 손이 멀끔하지 않은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는, 평범하지 않은 디자인의 표지가 눈에 띄어서였을까. 아니면 일생일대의 사건에서 막 벗어난 내게 선생님의 애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 손을 번쩍 들어 선생님께 책을 빌렸다.
필독 도서 리스트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아이들과 달리, 나는 인터넷소설로 글을 읽는다는 행위를 꽤나 다져놓은 상태였다. 어쩌면 같이 이야기 나눌 친구가 없었던 탓에, 인터넷소설 속 주인공들과 친구를 맺고 가치관을 공유하고 감정을 배운 것일지도. 쉽게 그 책을 읽으리라 다짐한 것도, 두꺼운 종잇장을 그저 인터넷소설의 연장선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두꺼운 종이들 사이사이를 메운 글자는 인터넷소설과 전혀 달랐다. 한 차원 너머에 있는 이야기 같았달까. 인터넷소설 안에는 읽는 사람이 사고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주요 등장인물이 나와 사건에 휘말리고, 그 사건을 해결하고, 또 다른 사건에 휘말리면 또 해결을 하고, 인물 간 갈등이 쌓였다가 해결되는 식의. 엄마가 갓난아기에게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는 이유식이랄까.
<빅 픽처>는 달랐다. 생계 유지를 위해 자신의 꿈인 사진 작가를 포기한 남자가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꿈이었던 업을 쟁취한 옆집 남자를 죽이고, 옆집 남자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어린 나에게 이 이야기는 하나의 메세지를 던져주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군가를 죽이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이 메세지가 작가의 의도에 맞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회 비판적인 메세지가 이야기의 이면에서 자신을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음은 확실하다. 이런 책이 독자가 사고할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한다는 것은 내게 큰 충격이자, 본격적으로 독서라는 행위를 즐기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그렇게 나는 중, 고등학교 도서부를 전전하며 책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 도서부를 들어가지 못한 때에는 도서관 한 구석을 내 보금자리로 삼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독서 행위를 즐겼다.
나를 위해 소비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 지금, 학창 시절처럼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하고 있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어둬야 한다, 나중에 커서는 책 읽을 시간이 없다, 라고 말하던 어른들의 말이 떠올랐다. 역시, 어른들의 말은 무엇 하나 틀린 게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하지만 무언가에 대해 사고하고 그것을 내 방식대로 적어보는 집필 행위는 멈추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요즘에 들어서야 조금 더 의욕과 열정이 생겼달까. 그래서 이런 글을 쓰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웃풋을 위해 인풋이 필요한 만큼, 책과 영화 등 영감이 될 만한 것들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구병모 작가의 <파과>와 <파쇄>를 보며, 어려운 문장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어려운 문장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오리지널한 표현력과 상상력이 깃든 글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언젠가부터 내 몸과 마음이 빠져들고, 어느새 깊숙이 파고들어온 이 글이라는 것이 언제까지 머물러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싫증을 잘 내고, 마무리만큼 중간을 어려워하는 나지만, 글만은 지금처럼 내게 싫증나지 않는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