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은 항상 빨간색.

by 다운

푹신하다 못해 푹 꺼지는 PC방 의자에서, 혜연은 번쩍거리는 자신의 캐릭터와 죽어 나가는 몬스터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보스를 처치하기 위해 시간과 공, 약간의 운을 들여가며 키워낸 자신의 캐릭터에게 필드에 널리고 널린 몬스터 따위는 금방 가루가 되어버리는 존재였다.


게임 창을 밑으로 내려버리고, 영화를 보기 위해 인터넷 창을 켰다. 휴머니즘, 새드 엔딩, 평화로움이 그득해 보이는 썸네일들을 지나 두근거리는 추격전과 혈흔, 뜨거운 로맨스가 낭자하는 장르가 눈에 닿았다. 혜연은 손은 자연스럽게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빨간 글씨가 새겨진 잔인한 스릴러물을 클릭했다.


주인공이 적의 몸 한가운데에 칼을 찌르자 가짜인 듯 진짜 같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거나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혜연은 어느새 주문해 두었던 매콤한 붉은 소스가 잔뜩 묻은 닭꼬치를 한 입 가득 베어 물면서도 반짝거리는 시선을 화면에서 떼지 못했다. 주인공과 애인이 좁고 어둡고 축축한 곳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사랑을 나눌 것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주변 자리에서 각자의 게임을 하느라 바쁜 사람들을 훑어보던 혜연은 헤드셋을 꽉 눌러썼다.


한 번도 술을 마셔본 적은 없지만,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하고 헤롱한 느낌이 혜연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씬이 끝나고, 주인공은 다시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까보다 더욱 격렬한 장면을 보여주겠지, 라는 기대감에 자세를 고쳐 앉은 혜연은 곧 실망감에 잔뜩 빠졌다. 주인공이 적을 죽이고 적으로부터 쫓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관객에게 설명하려는 듯 주인공의 과거 이야기가 영화의 마무리 장면까지 이어졌다. 혜연의 손에는 텅 빈 나무 꼬챙이만이 남았다.


쯧, 혜연은 혀를 차며 헤드셋을 벗어버렸다. 그때 혜연의 머리 위, 정확히는 혜연의 자리 윗부분에서 톡톡, 하는 소리가 났다. 슬쩍 위를 올려다본 혜연의 시선에 씩 웃고 있는 은호의 얼굴이 닿았다.


"뭐, 뭐야?"

"넌 혼자 여기서 뭐 해? 게임해?"


혜연의 자리로 오려는 듯 은호의 모습이 휙 사라졌다. 혜연은 다급하게 화면은 게임 창으로 돌리고, 거울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닭꼬치 소스가 살짝 묻은 볼을 신경질적으로 닦아 내고, 꼬치를 먹느라 지워진 입술 색을 빨간색 틴트로 채웠다. 자신의 머리를 가벼이 건드리는 느낌에 틴트와 거울을 숨기며 의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여전한 은호의 미소가 혜연과 모니터를 번갈아 보았다.


"너도 이 게임해?"

"어? 어어... 너도 친구들이랑 게임하러 왔어?"

"아니? 혼자 왔는데. 너도 혼자야? 나 부르지."


조금씩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은호의 몸에 이리저리 시선을 회피하던 혜연은 화장실을 가겠다며 빠르게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흐르는 찬물에 손을 대어 정신을 부여잡고, 부끄러움에 발갛게 달아오는 볼을 차가워진 손으로 매만지며 열을 식혔다. 콩닥, 콩닥, 심장이 가슴을 가볍게 노크하듯 두드리는 소리가 혜연의 온몸을 짧게 또 짧게 울리었다.


간신히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온 혜연의 눈앞에는 제 자리 또는 제 갈 길을 갔어야 할 은호가 있었다.


"하도 안 오길래 변기에 빠진 줄 알았네."


콩닥, 쿵, 쿠궁, 애써 억눌렀던 심장이 다시 그리고 더 세차게 울렸다. 식혀놓은 볼이 다시 달아오를까, 그것을 은호에게 들킬까 두려워 큰 덩치 사이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탁, 차가운 벽과 은호의 손이 마찰을 일으켜 나는 소리가 혜연의 눈앞을, 발걸음의 앞을 막아내었다. 혜연이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돌아보자마자 은호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았다.


영화 속 혈흔이 낭자하던 장면에서도,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던 장면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아플 만큼 두근거리는 심장이, 몸살감기로 침대에 틀어박혀 누워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뜨거운 열감이, 지금 이 순간 혜연의 온몸 구석구석에 꽂혀 들었다.


긴 듯 짧은 순간이 끝나고, 은호의 입술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급하게 발라 미처 마르지 않은 틴트의 빨간색이 은호의 입술에 묻어났다. 몽롱한 머릿속의 혜연은 자연스레 입술 위 자국을 슥 닦아냈다. 은호의 귓바퀴에도 빨강이 한껏 묻어났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