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노랑을 제일 좋아했던 이유

by 다운

뜨거운 여름이었는지 추웠던 겨울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 방학 끝까지 미뤄놓았다가 꾸역꾸역 써 내려갔던 그림일기를 구석에서 발견한 건 12년의 학업 생활을 청산하고 회사 근처로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던 어느 날이었다.


칸을 벗어나 삐뚤빼뚤하게 남은 글씨체와 색채 하나 없이 선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은 당시의 내가 얼마나 일기를 쓰지 싫었는지를 지레 짐작할 수 있는 증거였다. 나도 모르게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일기 한 장 한 장을 넘겨보았다.


한 페이지에는 선생님이 정해준 주제로 추측되는,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이라는 제목과 함께 거친 질감으로 칠해진 노란색이 가득 물들어 있었다. 그 아래 적힌 글씨를 인상을 쓰면서 열심히 읽어 내렸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노란색이다. 왜냐하면 모르겠다. 엄마가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란 개나리가 생각났다. 엄마는 꽃을 보는 걸 좋아한다. 개나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노란색을 좋아할 것이다.


엄마가 노란색을 좋아하는 이유를 엉터리로 써놓은 걸 보니, 당시의 나는 엄마가 노란색을 좋아하는 이유를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옷이나 브로치, 가지고 다니는 소지품 중에 노란색을 띠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상하네. 그림일기를 한 손에 들고 방문을 벌컥 열어 내 옷을 개어주고 있는 엄마의 옆으로 다가갔다.


"엄마."

"응? 짐 정리 다 했어?"

"아니. 나 어릴 때 쓰던 그림일기 찾았는데."


그리고 노란색이 물든 페이지를 엄마에게 불쑥 내밀었다. 엄마도 삐뚤한 글자가 유독 눈에 띄었는지, 하하 웃으며 얼마나 일기를 쓰기 싫었으면 이렇게 지렁이가 기어가듯 썼냐고 놀려댔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색 말이야. 노란색이라고 써져 있잖아."

"어머. 그러네."

"왜 노란색이야? 엄마 갖고 있는 것 중에 노란색 없잖아."


으음, 엄마는 괜히 초롱초롱해진 눈빛으로 일기장을 바라보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너 기억나? 유치원 가서도 화장실 가기 무서워서 기저귀 차고 다녔던 거."

"엥? 아니. 근데 그게 좋아하는 색이랑 무슨 상관이야."

"갓난쟁이일 때부터 걸음마할 때까지 맨날 기저귀 갈아주면서, 그 안에 노란 지도를 엄마가 얼마나 질리도록 봤겠니."

"그게 이유라고?"


엄마의 말에 나는 저절로 엑, 하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냥. 그때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네 모습을 보니까, 노란색이 제일 먼저 떠올랐나 보지."

"그럼 진짜로 엄마가 좋아하는 색은 뭔데?"

"그런 게 어딨어. 으이구. 얼른 가서 짐 정리나 마저 해."


엄마의 등살에 밀려 나는 또 이유를 듣지 못한 채 방 안으로 쫓겨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체, 하고 문을 닫으려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손을 멈칫했다.


"기저귀 찬 갓난쟁이일 줄 알았던 애가 벌써 어른이 됐네."


문 틈 새로 본 엄마의 미소는 어쩐지 조금 씁쓸하고, 어쩐지 조금 슬퍼 보였다. 다시 일기장을 펼쳐 보았다. 노란색으로 물든 페이지에 눈물 한 방울이 툭, 떨구어졌다. 손으로 물기를 슥슥 치워냈지만 오랫동안 종잇장에 굳어진 색은 용케 번지지 않았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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