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쿠투부카(4)

by 상재

10.


금악(金岳) 목마장의 넓은 초지에 오백의 몽골 기병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풍랑이 그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파랗게 물들었고, 탐라의 북쪽 바다는 전함으로 가득 찼다.


최영의 토벌선은 대화탈도(大火脫島) 부근에서 세 방향으로 갈라졌다.


백여 척은 소화탈을 거쳐 비양도(飛揚島)까지 일직선으로 죽 달려왔고, 오십여 척은 서쪽으로, 나머지 백 오십여 척은 동쪽으로 나아갔다.


당장 우리가 상대할 고려군의 규모는 전함 백 척뿐이어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관 삼촌의 셈법대로 척당 팔십 명을 세보면 팔천 명이나 되었다.


고작 오백의 기병으로 어찌할 수 없는 대군단이었다.


토벌선이 정박을 위해 명월포로 들어서자, 금악과 명월이 무척 가깝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거대한 군사가 금방이라도 몰려올 것 같아서 아찔한 기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명월포는 대규모의 선단이 정박하기에 조금 작았다.


백여 척의 전함을 작은 공간에 정렬시키느라 고려군의 상륙이 지체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한 기의 기마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쏘지 마시오. 편지를 전하러 왔소.”


초 삼촌은 힘껏 당겼던 시위를 천천히 놓았다. 다가온 사내는 고려군의 투구와 갑옷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최영 장군의 전령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곤 장군께서 다행스럽게도 유화책 꺼내었으니, 편지를 잘 읽어보라고 말했다. 초 삼촌의 표정이 밝아졌다.


얼른 편지를 받아 펼쳐보던 초 삼촌의 얼굴은, 그러나 점점 어두워졌다.


“이보시오. 회유의 대상에 성주, 왕자와 같은 탐라의 토호 세력만 언급되었소. 그들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내용이로군. 우리 카치에 대해선 별말이 없소.”


“그렇습니까?”


“몰랐소? 우리를 토벌하는 동안 토호들은 얌전히 있으라는 소리를 길게도 써놓으셨군. 성주에게도 편지를 전했소?”


“들렀다 오는 길이오.”


“뭐라 하던가?”


“알겠다, 한마디 하셨소.”


“그렇군. 그렇게 되었구나. 당신, 편지 내용을 정말 몰랐소? 이따위 편지를 우리에게 전하는 이유가 뭐요? 놀리는 겁니까?”


“……후우, 놀리다니요, 아닙니다, 최영 장군은 그렇게 가벼운 분이 아닙니다. 이보시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대명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였으니, 명나라를 납득시킬 명분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이 그렇게 되어버렸소. 그냥 그런 것이외다.”


“우리가 어쩌면 좋겠소?”


“저는 전령일 뿐입니다. 제 생각이 중요하겠습니까?”


“얌전히 목을 바치면 되겠소?”


“나는 모르오. 당신들이 판단할 문제요.”


“책임질 사람이 필요한 것이겠지?”


초 삼촌의 질문은 아버지의 결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결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초 삼촌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군관은 대답을 머뭇거리며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황급히 떠나갔다.


멀어지는 군관을 보며 초 삼촌이 입을 열었다.


“데리비스, 어찌 생각하나?”


“고작 책임질 사람 하나가 필요했다면 최영 장군이 직접 나서진 않았을 겁니다.”


“음보, 네 생각은?”


“전함이 삼백 척이오! 병사가 이만이 넘소! 탐라의 인구가 이만이 채 못 되는데 무슨 뜻이겠소? 이만한 군사를 움직였으니 반드시 결과를 내려 할 겁니다. 쿠투부카 형님, 희망 따위는 없소. 머뭇거리지 마시오!”


관 삼촌의 말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마치 초 삼촌의 희생을 떠올린 나를 타이르고 대신 변명하는 느낌이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오백의 탐라 기병이 죽음을 각오한 듯 사납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치 이번 전쟁의 결말을 모두 짐작한 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마치 광기와 같았다. 마치 불꽃으로 뛰어드는 나방과 같았다.


마치 내게 말하는 듯했다. 잊지 말아라! 오늘을 절대 잊지 말아라!


초 삼촌이 빙그레 웃었다.


“탐노, 부인과 자식들을 부탁한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법화사(法華寺)로 가거라. 승려들이 바닷길을 안내할 것이다.”


“삼촌들은요?”


“우리는 동해포(東海浦)에 배를 마련해 두었다. 걱정 말거라. 너에게 큰 짐을 지었구나.”


관 삼촌이 덧붙였다.


“탐노야, 바투르! 딸아이를 부탁한다!”


“네, 음보 삼촌!”


동해포는 서아막 차귀현(遮歸縣)과 가까운 포구였다. 혹시 패배하더라도 곧바로 도망치면 배를 타고 몸을 피할 수 있으리라.


나는 내 일을 잘 하면 되었다.


명월포에 고려의 군진이 마련되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되어 간다.


나는 말머리를 돌려 마을을 향해 달렸다. 잠깐 돌아보니 초 삼촌이 오백 기마와 함께 돌격하고 있었다.


중산간 초지에서 바다를 향해 빠르게 빠르게 달려갔다. 마치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아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에 남은 삼촌들이 이미 피난 준비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가운데 성주 고신걸 어른도 있었다.


성주 어른은 내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상황이 정리되면 성주전으로 오라고 했다.


최영으로부터, 고려로부터 보호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 정도의 입김은 아직 남아있다고, 다짐하듯 말했다. 그리고 살아 돌아오라 덧붙였다.


나는 여전히 성주 어른이 불편했다. 아버지는 희생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지만, 나는 아직도 아버지를 잡으러 왔던 성주 어른을 기억한다.


대충 고개만 까닥이고 어머니를 말에 태우려다가, 마음이 금방 바뀌었다.


어머니는 많이 아프셨다. 피난길에 무슨 일이 어떻게 생겨날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피난길을 견뎌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나는 입술을 깨물며 성주 어른께 부탁했다. 어머니를 데려가 달라고.


성주 어른은 가타부타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저 어머니가 탄 말의 고삐를 가만히 잡았다.


어머니는 내게 손짓했다. 귓가에 속삭였다. 탐노야, 책임지지 않아도 괜찮아. 위험하면 도망쳐, 알겠지?


나는 끄덕였다.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다시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책임을 져야 한다. 사내는 무릇, 책임을 져야 한단다!


어머니가 뭐라든, 아버지가 뭐라든 사실 상관이 없었다.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나는 한때 탐라만호의 아들이었다. 나는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였다.


나는 운명처럼 그것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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