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쿠투부카(6)

by 상재


12.


어느덧 노꼬메 오름에 이르렀다. 나는 노꼬메 꼭대기에 올라 명월포를 바라보았다.


초 삼촌이 이끄는 탐라 기병이 어음 일대를 내달리고 있었고, 고려군이 그 뒤를 쫓았다.


상황이 좋지 않은가?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전쟁의 결말은 도저히 뒤집힐 수 없이 결정되어 있었다.


초 삼촌의 기병대가 금악 새별오름에 도달하여 오름을 크게 돌았다.


문득 한 줄기의 희망이 솟아났다. 저건 초 삼촌과 매번 하던 꼬리잡기 놀이였다.


초 삼촌은 패주를 가장하여 고려군을 끌어들일 계책이었다. 새별오름을 한 바퀴 돌아서 추격하는 관병들의 뒤를 잡으려는 것이다.


오름 뒤편에는 갈아탈 말 오백 필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영 장군은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고려군은 초 삼촌의 전략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새별오름 앞에서 갑자기 추격을 멈추고 활시위를 당겼다.


곧 수백 발의 화살이 하늘을 수놓았다.


말을 갈아타고 새별오름을 돌아 나오던 초 삼촌의 기병대가 속수무책으로 화살비를 맞았다.


비명이 여까지 들려왔다.


초 삼촌은 급히 방향을 바꾸어 남쪽으로 도망쳤다. 아마 배를 준비해 두었다던 동해포로 갈 것이다.


나는 마을 삼촌들에게 말했다. 성주전으로 가세요.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는 어쩌려고?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삼촌들을 재촉했다. 어서 가세요, 어서요.


이윽고 나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중산간을 가로지르고 자왈을 헤치며 쉬지 않고 달렸다.


멀리 남쪽 바다에 여섯 척의 선박이 범섬을 향하고 있었다. 삼촌들이 동해포에 준비해 두었다던 선박을 타고 이동하는 것 같았다.


그 뒤를 오십여 척의 전함이 쫓고 있었다. 고려군이 대화탈에서 서쪽으로 보내두었던 그 함대였다.


최영은 탐라에 진입할 때부터 지금의 상황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일까?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삼촌들은 바다에 익숙하지 않았다. 배는 느렸고, 금방이라도 따라잡힐 듯 보였다.


초 삼촌은 결국 작은 섬에 정박했다. 범섬이었다.


깎아지른 수직 절벽 위에 평탄한 평지가 있었다. 초 삼촌은 그곳에 군진을 꾸렸다.


높은 절벽에 의지하여 농성할 계책이겠지만 궁여지책이었다. 화살도 식량도 없다. 삼촌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고려의 함선이 범섬을 포위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범섬 가까운 법환포에도 고려군의 숙영지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싸울 생각조차 없는지 야영이라도 하는 듯 여유로웠다.


벼랑 위에서 수십 발의 화살이 쏟아졌지만 고려선의 갑판에 닿지 않았다. 화살비는 금방 멈췄다.


수면이 고요하게 출렁이는 찰나에, 범섬을 노닐던 새들이 한순간에 날아올랐다.


절벽 위에서 검은 형체가 돌덩이처럼 떨어진다. 첨벙첨벙 파문이 일었다. 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나무 상자에 담긴 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고려군은 욕을 하며 시신을 건져 올렸다. 싸움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전장에서 눈을 돌렸다.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결말이었으니까, 아쉬울 것도 없었다.


나는 가슴 속에 치미는 울화를 다스리며 중얼거렸다. 정해진 운명이었어. 너 따위가 어떻게 바꿀 수 없어. 너는 잘 해냈어. 네 탓이 아니야.


마을로 돌아오는 내내 정신이 멍했다. 모든 게 흐릿하여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았다.


깜깜한 밤이었다. 성주전 마당은 마을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들에게 차마 소식을 전할 수 없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침 성주 어른이 손짓했다. 어머니는 잘 계신다, 걱정 말거라, 잘 끝날 거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가 잘 끝난다는 겁니까? 삼촌들이 잘 죽었다는 뜻인가요? 목마장을 모조리 빼앗길 텐데, 잘 빼앗긴다는 뜻인가요?


안다. 지금은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속마음을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성주 어른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엄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려는 걸 알았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아이를 구할 용기도 내지 못한 주제에, 겁쟁이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화를 낸단 말인가.


어머니를 보자 눈물이 왈칵 나왔다.


고작 하룻밤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삼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내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 말라가는 어머니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성주 어른은 바삐 움직였다. 전후처리를 위해 고려에서 온 관리들을 만나고, 최영 장군을 알현했다.


최영 장군도 성주 어른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 듯했다.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성주 어른의 요청을 제법 수용한다고 들었다.


새로 부임하게 될 박윤청 목사가 반역의 무리를 내놓으라고 떼를 썼다는데, 성주 어른은 최 영공은 이미 승전하셨으니 자질구레한 일로 더럽히지 말라 타일렀단다.


최영 장군은 군민이 많이 죽어 일정(一丁)이라도 아쉽다면서 우리를 살려주었다.


그렇게 토벌은 마무리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태풍처럼 거세게 몰아치다 갑자기 끝나버렸다.


나는 최영 장군의 집요함에 놀랐다. 그는 바다를 수색하여 초 삼촌의 시신을 기어이 찾아내었고, 그 목을 베었다. 석 삼촌은 허리를 베어 죽였다.


원나라에서 하사한 인신(印信)과 금패를 찾아다니길래 나는 몰래 숨겨두었다. 아버지의 유품을 빼앗길 수 없었다.


최영 장군은 우리에게 수십만 필의 말이 있는 줄 알았나 보다. 목마장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는 것이다.


그가 획득한 말은 고작 천여 두에 불과했기에 명이 요구한 수량에 여전히 미치지 못했다.


최영은 말을 가져가는 대신 탐라를 안무한다면서 여러 마을에 나누어 주었다.


역시 말 이천 필은 트집에 불과했다. 대명 황제에게 댈 그럴듯한 핑계가 필요한 것이었다.


어쨌든 말에 의지해 살던 우리 마을은 모든 생계 수단을 빼앗기고 졸지에 땔감이나 줍는 처지가 되었다.


서아막은 비참하게 찢겼다. 아버지가 이끌던 작은 세계가 무너지자 나는 마음 둘 곳을 잃어버렸다.


박윤청 목사의 횡포는 이용장 목사보다도 심하여서 성주 어른마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특히 마축사(馬畜使) 김계생은 소, 양, 돼지 할 것 없이 군민들의 가축을 알뜰히도 챙겼다.


새끼 치는 숫자까지 꼼꼼히 조사하여 세금을 매겼다.


열 마리 새끼를 낳으면 그중 두셋은 죽어 나가기 마련인데, 김계생은 알면서도 모른척하고선 나중에 마릿수가 빈다며 딴지를 걸었다.


성주 어른은 김계생의 횡포를 불편하게 여기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


나는 그딴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머니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창문만 덜컹거려도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시름시름 야위어갔다.


약을 쓸 처지가 아니어서 산나물을 캐고 보말을 주워다 죽을 쑤었다.


낙엽과 솔방울, 마른 똥 따위도 부지런히 모았다. 어머니 계신 방을 따뜻하게 데워야 했기 때문이다.


가끔 중산간에 오를 때면 삼촌들과 함께 말을 달리던 기억이 떠올라 울적해졌다.


그럴 때마다 먼바다를 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탐라를 떠나고 싶다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나는 열두 살이 되었고, 계절은 다시 겨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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