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슬슬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선선해졌다.
나는 한라산을 넘기로 결정하였다. 중산간이나 해안으로 움직이다가는 자칫 고려군에게 잡힐 수도 있었다.
한라산은 높고 험한 곳이었다. 고려군도 우리를 쉽게 쫓지는 못하리라 생각되었다.
산 중턱에 이르자 눈이 탁 트이는 고원이 나왔다. 가끔 삼촌들과 말을 타고 올랐던 어리목이었다.
시야가 좋아서 바다까지 한눈에 보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이동하면 산남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날이 어둑해지자 어른들은 하룻밤 쉬어 가자고 요청했다. 하루 종일 산을 오른 탓에 다들 매우 피곤해 보였다.
나는 시선을 돌려 바다를 보았다.
멀리 횃불이 별처럼 떠올랐다. 조천포(朝天浦)와 성산포(城山浦) 일대였다.
대화탈에서 갈라져 동쪽으로 향한 백 오십여 척의 전함이 조천과 성산으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동아막 삼촌들도 고작 오백여 기의 기마로 백 오십여 척 규모의 군사를 상대로 항전해야 했다.
고려군은 병력의 여유가 많았다. 일부 군사들을 돌려서 피난 하는 카치의 무리를 수색할 것이 분명했다.
어린아이와 노인이 섞인 우리는 느렸고, 고려의 정예들은 빠를 것이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어른들에게 말했다.
밤사이에 조금이라도 산을 더 올라야 한다고. 더 올라가서 가시나무 가득한 자왈(덤불) 속으로 숨어야 한다고. 피부가 찢어져도 멈춰선 안 된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말했다. 캄캄한 밤중에 두무악엘 들어가면 틀림없이 죽을 거라고. 추워서 죽고, 발을 헛디뎌 죽고, 그도 아니면 길을 잃어 죽을 거라고.
틀린 소리가 아니었기에 더는 밀어붙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흩어져 몸을 숨겼다.
나는 무성한 조릿대 사이에 폭삭 누웠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다시 일어나 땅을 조금 파고 마른 낙엽을 긁어모았다. 몸을 누이니 조릿대가 바람을 막아주고 낙엽이 한기를 물리쳐 주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눈이 부셨다. 벌써 해가 뜨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뛴다. 어제 하루가 너무 버거웠던 탓일까? 대책 없이 잠들어 버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다가 황급히 도로 누웠다.
어리목은 시야가 트인 곳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발각될 염려가 있었다. 나는 숨조차 참아가며 기척을 살폈다.
여기다!
별안간 누가 소리치고 발소리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아이고 나리, 살려주시오, 울부짖는 어른들 사이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와 고원을 울렸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피난길에 어린아이라고는 관 삼촌의 막내딸뿐이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수십 명의 병사를 홀로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주저하게 만들었다. 무력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삼촌들처럼 칼을 치켜들고 용맹하게 나서고 싶었지만, 죽음의 공포가 계속해서 나를 주저앉혔다.
아이만이라도 살려주시오.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지휘관이 말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찌 도망을 치는가? 모조리 죽여라!
옆에서 병사 하나가 물었다. 아이는 어찌할까요?
지휘관은 말했다. 역모다, 역모란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지휘관은 먼저 등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뒤이어 스윽 슥 소리가 들렸다. 윽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풀썩 쓰러진다.
아이는 계속 울었다. 어리목 고원이 울음으로 가득 찼다.
죄가 있다고 사람을 즉시 죽이는 법을 본 적이 없다. 그딴 건 전쟁통에나 그러한 것이다. 적군과 목숨을 건 결전을 벌일 때나 하는 짓이다.
탐라는 아직도 고려가 아니었다. 저들은 탐라를 정복하러 온 정벌군이었다. 반란의 무리를 척살하러 온 토벌군이었다.
원래 우리 것이었던 말을 내놓으라고, 그런데 그게 숫자가 적으니 죽으라고 한다. 역모란다. 삼대를 멸족할 수 있는 죄목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관 삼촌의 막내딸, 아장아장 걸어와 땀을 닦아주던 나의 조카를 보았다.
병사 하나가 쭈뼛거리자, 옆에 다른 병사가 칼을 힘껏 내리쳤다. 나머지 병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풀잎을 스치고, 아이 울음소리가 멈추었다.
병사들이 저마다 탄식하며 이를 혀를 찼다. 염병할 세상, 놔두자니 군법이 무섭고, 죽이자니 하늘이 무섭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러나저러나 죽을 운명인 게지.
어서 갑시다. 촌각이라도 더 머물다간 천벌을 받겠소.
병사들은 마치 못 볼 꼴이라도 본 것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서둘러 내려갔다.
눈물이 주룩 흘렀다. 자기들이 죽여 놓고 하늘이 무서워 남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화가 났다. 화가 나면서도, 저들조차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에 미치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나는 온통 모순덩어리였다. 이름조차 없는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런데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까? 지금에 와서 아버지의 희생에 무슨 의미가 남아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왜 여기에 있을까? 아이를 구했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다.
내가 죽더라도 아이를 구해내어야 했다. 나와 아이가 모두 죽더라고 그랬어야만 했다. 저 병사들과 함께 죽었어야 마땅했다.
볕이 잘 드는 땅을 골파 맨손으로 파내고 아이를 조심스레 뉘었다. 흙이 피를 머금고 까맣게 변했다.
합장하여 기도를 올린 뒤, 자갈을 모아 아이를 덮었다. 작고 초라한 돌무덤이 애처로웠다.
부디 내생에는 좋은 곳으로 가거라.
하늘에 까마귀가 맴돌았다. 무책임한 자는 어서 꺼지라고 시위하는 듯했다.
고려군이 철수하였기에 나는 한라산 곳곳을 이동하며 흩어진 사람들을 모았다.
가는 곳마다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고, 까마귀가 몰려들었다. 나는 몸도 마음도 매우 지쳐서 까마귀를 내쫓을 힘도 없었다.
겨우 사람들을 한데 모아 산을 내려갔다. 어디로 가느냐 묻는 사람들에게 성주전으로 간다고 대답했다.
하룻밤 사이에 어리목까지 추격해 온 고려군의 속도를 볼 때, 이미 온 섬이 고려군으로 뒤덮였을 터였다.
사방이 바다로 가로막힌 섬에서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성주 어른을 믿는 것 외에 남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가 남겨 주신 금패를 만지작거렸다. 남은 사람들만이라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지켜달라고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