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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타오 Dec 21. 2024

약수터 꿈

진아의 오늘 하루는 정말로 최악이었다.
박지훈의 거짓말과 무례함, 성추행범과의 끔찍한 충돌, 그리고 최민기의 배신감까지. 모든 사건들이 진아를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소멸시켜버리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녀는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진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방으로 들어갔다.

규리는 거실에서 과자를 먹다 말고 진아를 힐끔 쳐다보며 혀를 찼다.
"드디어 미쳤구나! 미쳤어!"
하지만 진아는 규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더니, 소원베개를 끌어안고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진아는 평소 꿈을 거의 꾸지 않았다. 혹은 꿈을 꾸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소원베개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선명한 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꿈속에서 진아는 아침 운동을 하고 있었다. 평소 아침 운동이란 진아의 사전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꿈속에서 그녀는 운동복을 입고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공기는 차고 신선했으며, 숲 속의 새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남자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훤칠했고,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땀 냄새마저 꿈을 통해 전달되는 듯했다. 이상하게도 진아는 그 장면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무의식 중에 미소를 지었다. "저 남자 누구지? 좀 멋지네."

그러나 꿈은 곧 이상하게 흘러갔다. 그 남자와 진아는 약수터로 가는 길에서 묘한 경쟁을 벌였다. 먼저 도착하려는 듯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진아는 점점 숨이 가빠지며 말했다.
"왜 저렇게 열심히 뛰는 거야? 대체 뭐 하자는 거야?"
하지만 남자는 대꾸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결국 약수터에 거의 다다랐을 때, 진아는 남자와 신경질적으로 대치했다.
"저기요! 왜 이렇게 뛰어 다녀요?"
남자도 화가 난 듯 뒤돌아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진아는 꿈에서 깼다.

현실로 돌아온 진아

"뭐야, 이런 개꿈이 다 있어?"
진아는 침대에 앉아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곧 꿈속의 장면들이 떠오르며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이거 단순한 꿈은 아닌 것 같아."

그러다 문득 소원베개를 떠올렸다. 묘하게도 이 베개에서 잠들면 항상 몸이 가뿐해졌다. 피곤도 금세 풀리고, 숙취도 사라졌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너무 개운해서 기분이 이상할 정도였다.

진아는 순간 무언가에 홀린 듯 결심했다.
"아니, 혹시 모르지. 그냥 한번 해보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빨을 닦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문제는 겨울 운동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추위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몰라서 결국 오리털 점퍼를 꺼내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나섰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진아의 얼굴을 스쳤고, 발밑엔 살짝 얼어붙은 눈이 미끄럽게 깔려 있었다. 진아는 조심조심 발을 내딛으며 동네 뒷산의 약수터를 향했다.

현실에서의 약수터 만남

얼마나 걸었을까? 진아가 산길을 오르고 있을 때, 오른쪽에서 갑자기 누군가 튀어나와 그녀를 앞질러갔다. 깜짝 놀란 진아는 잠시 멈춰 섰다.
"뭐야, 새벽부터 사람 놀라게 하고 말이야!"
남자는 이어폰을 끼고 아무렇지 않게 달리며 사라졌다.

진아는 화가 났다. 어제 하루가 떠오르며 괜히 이 남자에게 짜증을 부리고 싶어졌다.
"이봐요!" 그녀가 소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달렸다.

진아는 분을 못 참고 다시 소리쳤다.
"이봐요, 잠깐만요!"
그러면서 속력을 내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체력이 부족한 진아는 곧 지쳐 헐떡이며 멈춰 섰다.

"하... 뭐야, 꿈속에서 본 장면이잖아. 그런데 저 남자는 대체 뭐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저렇게 도망을 가는 거야?"
진아는 숨을 고르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다 정상 근처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약수터였다.

진아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약수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꿈속에서 본 그 남자를 다시 마주쳤다. 그는 물을 한 손으로 떠 마시며 쉬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얼굴엔 땀이 줄줄 흘렀다.

진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가갔다.
"저기요!" 그녀가 단호하게 외쳤다.
남자는 이어폰을 빼며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요?"
진아는 화난 듯 말했다.
"왜 갑자기 뛰어가요? 내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 미안한데요. 그냥 혼자 달리는 게 습관이라서요. 쫓아오는 건 몰랐어요."

진아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몰랐다고요? 내가 저 밑에서부터 한참 뛰어왔는데요?"
남자는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솔직히 좀 무서웠어요. 누가 자꾸 쫓아오는 것 같아서... 그런데 왜 쫓아온 거예요?"

진아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꿈속 장면과 너무 닮아서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뿐이었다.
"그냥... 아무튼, 다음부터는 사람 놀라게 하지 마세요."

남자는 피식 웃으며 물통을 채우며 물었다.
"아침 운동 자주 하세요?"
"아니요, " 진아는 대답했다.
"오늘 처음이에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 오게 될 것 같더라고요."

남자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음, 신기하네요. 저는 매일 와요. 그런데 오늘 처음 뵙는 얼굴이라."

그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자주 보겠네요. 저는 민규라고 합니다. 강민규."
진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잡았다.
"진아예요. 유진아!


진아는 꿈속 장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과 설렘으로 인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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