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동화책
한 청년이 죽었다. 산업 현장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사고였다.
늘 그래 왔듯 그동안의 사고로 배운 것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청년의 죽음을 통해 기업 윤리의 부재와 국가적인 안전 불감증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는 친구의 연락이 왔다. 나는 조용히 청년을 추모하고 시위하는 곳을 다녀왔다. 친구의 얼굴 한번 볼 겸, 정의감에 한번 물들어 볼 겸.
한 청년의 죽음에 세상은 무력이 답했다. 답답한 현실은 바뀌지 않노라 그리 말하는 듯했다. 비가 내렸다. 나는 편의점에서 급하게 우산을 사서 쓴 후 덕수궁을 찾았다. 비 오는 고궁의 운치를 느끼며 이곳을 지을 당시에도 청년이 희생되었을까 생각했다.
고도로 발달 중인 사회는 청년의 희생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되어있는 듯했다. 그날은 아프게 울었다. 비 내리는 고궁 속에서 멈춰서있었다. 이곳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 듯했다.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했다. 두려웠다. 나도 그렇게 도구로 쓰여 사라지는 게 아닐까. 문득 내 존재에 대한 회의를 품었다. 십 대에나 끝냈어야 할 고민이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신념의 영역에서나 이야기할 수 있는 고찰이 문득 나를 흔들어 놓았다.
비는 흐른다. 떨어지고서 어디론가 계속해서 사라진다. 마치 시간처럼. 마치 우리의 존재처럼 어디로부터 인가 홀연히 나타나 허무하게 사라진다. 상승하지 않고 그저 끝없이 추락할 뿐인 빗방울처럼 청년은 아파트 현장에서 밧줄이 끊어져 죽었다. 그렇게 그의 시간은 영영 멈춰버렸고 우리의 현재는 또 한 번 죽임 당했다.
전화가 왔다.
“어디쯤이야?”
“지금 집에 가고 있어요 어머니. 밖에서 잠깐 쉬고 있었어요.”
청년의 가족을 생각한다. 나의 가정을 생각한다. 평화가 깨어진 그곳을 차마 떠올리기 참담했다. 나의 죽음을 생각했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은 언제나 나를 죽이려 들었다. 나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고, 나의 호흡을 못마땅해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사라진다면 나는 풍비박산 날 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 왜 나를 상처 입히면서 안정을 꾀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마음은 그렇게 망가져있었다.
다시 죽어간 우리의 현재를 생각한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위는 잘 끝났나?”
“어, 그래. 왜 줘서 고맙다.”
“나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뭔데?”
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성자처럼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 부조리와 맞서 싸웠던 친구에게 언제나 한 가지 질문이 있었다.
“지금 기분은 좀 나아졌나.”
“기분이라..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나중에 시간 내서 밥이나 먹자.”
“그래. 힘내고.”
“어. 너도”
우리의 대화는 짧았다. 그러나 필요한 모든 말을 했다. 청년의 삶도 짧았다. 그러나 그는 단말마의 비명으로 사라져 갔다. 그는 평생에 하고 싶은 말들을 전하지 못한 채 그렇게 떠나갔다.
이러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기억하고 추모한다면 좀 괜찮아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노하고 맞서 싸우지만 현실은 여전히 우리의 인격을 부정했다.
성자는 공의와 정의의 나라를 이야기했다. 공의로 다스리고 정의로 재판하는 세계를 전했다. 그는 성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양한 군상의 인간을 만났다. 그가 전하려 했던 나라는 그런 곳에 임하는 높은 곳의 영광이었으나 낮은 자들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종교는 무엇도 위로하지 못했다.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도 없으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현재에 탑승하여 이득을 나눠 누리려 했다. 그런 종교에서 성자의 향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성자의 눈물은 저 덕수궁 너머 광화문 어딘가, 강남 어딘가에서 분노하고 있는 청년들의 눈물 속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삶과 인격에 대해서 나누고자 함이다.
집에 가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건너가 위해 나는 줄곳 찾아보던 신문 기사들을 다시 꺼내 읽기 시작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언론도 어느새 조용해지고 다시 대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 아기 시작했다. 청년의 죽음은 그렇게 세상에서 영영 잊힐 터였다. 또 다른 청년의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하면서 청년들의 오늘은 그렇게 매일 같이 끝을 맞이할 터였다.
언제나 바뀔까. 언젠가는 바뀔까 하는 믿음으로 싸우는 이들이 있었지만 우리의 현재는 덕수궁의 세월처럼 멈춰 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는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의 망령된 것들에 사로잡혀 세월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삼키려는 현재의 이권을 침탈 당한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나라들처럼 우리의 것들을 빼앗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론이 희망을 다루지 않은지 오래됐다. 그리고 종교가 종말을 다루지 않은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언론은 현재를 다뤄야 희망이 있는 것이고 종교는 끝을 다뤄야 희망이 있는 것이다. 이미 임했지만, 아직 임하지 않은 그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