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첫 데이트를 하던 10여 년 전, 토요일 오후의 호수공원.
그는 토요일 오전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날 위해 도시락을 싸 왔더랬다.
뭘 싸왔을까?
그의 가방에서 도시락통 몇 개가 나왔는데, 그 안에는 주먹밥과 여러 가지 반찬이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참치를 옥수수통조림과 마요네즈로 버무린 반찬이 맛있어서 기억에 남았다.
엊그제 주말 저녁,
(그는 이제 김셰프라 불린다)
난 주말이면 김셰프를 믿고 먹고 싶은 걸 마구 내질러버리는 아주 게으른 습성(?)이 생겼다.
저녁을 간단히 끝내자는 심산으로 "우리 샌드위치 해 먹을까?"라고 생각나는 대로 또 던졌다.
"속에 넣을 거 뭐 있는데?"
"계란, 야채 조금 있으니까 햄이랑 상추만 사 오면 될 거 같은데...."
슬리퍼를 질질 끌고 5분 거리의 동네 마트에 갔다.
김셰프의 맘에 드는 햄이 없었다.
집에 돌아와 슬리퍼를 운동화로 바꿔 신고 운전하는 김셰프 옆 조수석에 앉아 큰 마트로 향했다.
분명 저녁을 간단히 끝내려고 했건만 햄, 양상추, 식빵, 참치캔 등등 한가득 안고 돌아왔다.
김셰프가 햄을 가지런히 썰어서 굽길래 계란 프라이까지 맡기려 했으나, 나보고 냉장고에 남아있던 메추리알을 처리할 겸 계란 샐러드를 만들란다. 양이 적으면 계란을 삶아서 보충하라며. 계란 샐러드엔 양파와 오이도 넣으라며 다져줬다. 마요네즈를 듬뿍 넣어 마무리했더니 계란의 고소함과 야채의 아삭함이 입안에서 춤을 춘다.
버터를 녹여서 구운 식빵에 계란 샐러드를 올리고, 그 위에 햄, 볶은 양파, 생토마토와 오이, 체다치즈, 양상추, 뚜껑을 덮을 식빵엔 마요네즈, 케첩, 겨자소스가 발라져 있었다.
한입 베어무니 감탄이 나온다.
"이거 맥도널드 빅맥 맛이야. 아니, 그거보다 더 맛있는데?!"
나 왜 흥분했지?
항상 그랬다.
뭐든 대충 빨리빨리 해치우듯 처리하는 내 옆에서 그는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모든 것에 디테일을 살린다. 그는 책도 천천히 읽으며 글도 느리게 쓴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을 한다. (단 설거지 하면서 핸드폰으로 예능을 보고, 게임하면서 매불쇼를 듣는다.) 더러운 걸 못 참아서 한밤중에도 화장실에 락스를 뿌린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는 상태도 못 견딘다. 이사 온 지 8년 만에 집안팎의 창문을 스스로 닦았다.
이젠 그가 옆에 있으면 나도 천천히 숨을 고른다. 그는 넷플릭스로 보고 싶은 영화 한 편 볼 시간도 못 내고 덜덜 떠는 날 의자에 앉히고 리모컨을 손에 쥐어주고는 방문을 닫고 나간다. 그 덕에 <서울의 봄>을 볼 수 있었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에 대한 글을 연재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도가 쪼끔 올라간 듯하다. 세상 모든 사람은 그저 다를 뿐이고 모든 장점은 단점을 동반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지난 결혼생활 15년간 의도치 않게(?) 나를 성장시켜 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덧,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와 애정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