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인데...
"이번 주에 택배하나 갈 거야!"
"뭔데?"
"창문 닦는 거, 우리 집 베란다 창문이 좀 더러워야지~"
며칠 후, 뭔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배송되었다.
'깨끗한 창문이라... 창문이 꼭 깨끗해야 하나?' 의문을 남긴 채 물건들이 주말까지 얌전히 남편을 기다리게 두었다.
금요일 밤 12시가 넘어서 들어온 남편은 2주 만에 봤더니 얼굴이 조금 여위었다. 아무래도 주말 내내 쉬고 싶어 할 각인데... 다음 날 오전에 있는 어머님과의 외식과 오후 스케줄이 조금 걱정되었다. 뭐, 피곤하다고 하면 나 혼자 움직여도 되니까...
토요일 아침, 9시 정도에 눈을 떴다. 옆에서 자고 있을 남편이 없다. 날은 흐리고 추워서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은 날씨인데 어딜 갔지? 궁금해서 거실로 나가보았다.
그는 거실 매트 위에 정체불명의 물건들을 잔뜩 펼쳐놓고 걸레 빠는 대야까지 가져다 둔 채 열심이다.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나와, 소파에 앉아 게임 삼매경에 빠진 딸내미들과 상관없이 그는 새로운 물건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뜯어보면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악~안 뜯어져~"
"근데 자기야, 우리 곧 나갈 건데? 좀 있다가 어머님 만날 거잖아?"
"알고 있어. 이것만 하고."
"그거 꽤 시간 걸릴 거 같은데, 지금 할 수 있겠어?"
대답대신 희한하게 생긴 삼각형을 들고 거실 창을 열더니 양쪽에 끼우고 잘 되는지를 체크하느라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눈치다.
'모르겠다. 난 준비해야지.'
어머님이랑 약속에 매번 늦었는데 오늘은 일찍 가서 기다려야겠다며 꽃단장을 시작했다.
남편이 슬쩍 들어오더니 한마디 한다.
"자기야, 좀 이따 다이소 가자."
"뭐 살 거 있어?"
"창문 닦는 긴 걸레."
"아, 창문 닦는... 그럽시다."
어머님이랑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은 집으로 보내고 우린 다이소에 들러 걸레를 사서 돌아왔다.
그는 셔츠를 걷어올리고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베란다 창 바로 앞에 있는 화분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작업하길래, 화분 좀 옮겨주고 나니 아예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본격적인 창문 닦기에 들어갔다. 화분을 치우고 보니 바닥 얼룩이 보여서 나도 대걸레질을 시작했다. 기왕 닦는 거 거실 전체랑 주방, 아이들 방과 안방까지 닦으니 개운하다. 남편의 눈엔 차지도 않겠지만 나로선 장족의 발전이다.
"우와, 이것 봐."
몇 시간 동안 작업한 결과 몇 년 동안 묵은 때가 벗겨져 투명해진 창유리 너머의 풍경은 해상도를 최고로 올린 HD TV 같았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이는 나무들의 모습이 저렇게 청량하다니! 날씨가 문제가 아니라 창문이 문제였네. 거실창문이 깨끗해지고 나서 오전에 블라인드를 올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너무나 선명해서...
그는 베란다 창문 닦는 걸 끝내고 나서야 조금 피곤한 기색을 띠며 온 집안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창문이 이렇게 많았네. 뽀얀 먼지는 말할 것도 없고."
"힘들어서 안 되겠어. 다음 주에 해야지."
눈은 한번 높아지면 내려오기 어렵다더니...
거실창문이 선명해지니 반대로 세탁실 너머의 풍경이 너무 뿌옇다. 저 먼지 쌓인 모기장이며, 창틀이며, 그 앞에 결로로 생긴 곰팡이며...
'안돼. 그냥 못 본 체 하자. 너 할 일 많잖아.'
자꾸 외면하면서 스스로를 세뇌한다.
창문 닦기 도구들은 거실 한쪽에서 자기 주인(?)을 일주일째 기다리고 있다. 계속 쓸 것 같아 아예 치우지도 않았다. 저걸 내가 손댈 날이 올까 봐 외면하는 중이다.
남편이 창문을 닦을 생각을 한건 지난주에 에어컨 청소와 세탁기 청소 서비스를 받고나서이다. 그동안 찝찝했던 것들이 깨끗해지니 그 옆의 창문도 생각났다나. 지극히 그 다운 발상이다. 깨끗함에 대한 정의가 매우 낮은 나로서는 이러한 발상 덕에 복에 겨워 뒷짐 지고 구경하다가 깨끗한 창문을 마주하니 작은 충격에 휩싸인다. 오래전 라식수술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세상이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 것에 놀랐던 때에 버금갈 만큼.
"자기, 유리 닦는 게 적성에 맞는 거 같은데?"
"안 그래도 우리 회사에 나보다 더 깔끔쟁이가 있는데, 유리 닦는 거 사업으로 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와, 정말? 자기보다 더 깔끔하면 엄청 잘하겠네."
한편으로 생각한다.
'남편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면 이게 딱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