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Atelier
< 문득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이 공간과 기억들을 꼭 간직해두고 싶었다. >
어느 유명 대학에선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눈을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만든 앨범 중 가장 잘 만든 앨범이 무엇이냐"묻거든 나는 자신 있게 "멜론에 들어가 2020년에 발매한 <Atelier>를 들으라" 답할 것이다.
아틀리에는 [작업실]이라는 뜻이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나의 작업실에 관한 이야기와 작곡가의 하루 일상을 시간 순으로 담았다. 그 앨범을 만들던 때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2020년 어느 여름날, 오랜만에 집을 나서 <호호미욜>로 향했다. 호호미욜은 상수역 쪽에 있던 카페의 이름이다.(얼마 전 다른 지역으로 위치를 옮긴 듯하다) 분명 커피가 맛있기로 유명한 곳인데 나는 그곳의 디저트를 좋아해서 휴일이면 종종 노트북을 들고 작업하러 들렀다. 한창 서울에 친구도 없고 지인도 없던 시기.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가 먹는 일이었던 나는 이처럼 휴일이 되면 혼자 라멘이나 초밥집을 탐방했다. 집집마다 맛이 다르고 특색 있는 당근 케이크, 티라미수와 같은 달달한 디저트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몇 년간 그러던 중 고독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다.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MBTI 검사를 하면 I(내향형) 성향이 90 가까이 나오는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떠올렸는진 모르겠다. 뜬금없지만 동네 모임 앱을 깔아봤다. 연애, 이성 만남이 주목적은 아니었으나 그런 부분을 일절 배제한 앱은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최대한 그런 느낌이 없는 것으로 골랐다.
막상 설치하고 나니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디 가서 말을 잘 붙이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나올지 전혀 알 수 없기에. 첫 모임은 디저트 모임에, 그 이후엔 다양한 모임에도 여러 번 참가해 보면서 모임앱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활동하던 중 마포구 쪽 커뮤니티에서 한 공간의 리뷰를 발견했다. 진정성 있게 쓴, 공간 분위기가 좋고 음식이 맛있다는 내용의 리뷰였기에 언제 한번 꼭 들러야지 하고 기억하고 있었다. 인지도 없는 앱이니까 광고일 리도 없었다. 그곳은 호호미욜에서 걸어서 20분 조금 더 걸리는 거리였고 그날은 마침 작업 중 저녁 시간대가 되어 밥을 먹으러 가봤다.
합정과 망원 사이에 위치한 <포트레이트부스>라는 공간이다. 도착해 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니 비밀 아지트 같은 공간이 나왔다. 기억 속 최초의 이미지는 오른쪽 평상에 여러 명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고 왼쪽의 주방에선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요리 중이었다.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도 있었다. 사장님이 바빠 보여서 안쪽 자리로 가서 슬쩍 앉았더니 들어오는 걸 못 보셨나 보다. 평상에 앉아있는 분들이 대신 손님 왔다고 사장님께 슬쩍 얘기하자 그제야 메뉴판을 가져다주셨다. 처음 보는 사람인 건 맞지만 사장님이 뭔가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셨다. 왜 그랬는지 나중에 알고 보니 예약제로 운영되는 곳이었더라. 사실 음식점도 아니고 예술가의 작업실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들어와 “여보아라. 음식 내놓아라.”하는 분위기로 앉아 있어 당황하셨겠지.
음식은 대부분 비건 메뉴로 준비되어 있었는데 나는 개의치 않고 토마토파스타와 두부샐러드를 주문했다. 당시 한창 잘 먹던 때라 준비된 음식 양이 제법 많았는데도 나오자마자 금방 다 먹어 치웠다. 음식을 다 먹고 난 후에야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아기자기하고 참 따뜻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그림도 여럿 걸려 있고 작업 도구들이 곳곳에 늘어져있어 한눈에 봐도 누군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뉴판을 다시 살펴보니 멤버십 시스템이라는 것도 발견했다. 일정 금액을 내면 공간을 공유 작업실처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공간이 맘에 들기도 하고 어차피 자주 밖에 나가 작업을 하니 그냥 이곳에서 해볼까 싶었다. 결단이 빠른 나는 집에 가기 전 "멤버십 가입을 하려는데요.." 하며 운을 띄웠고 그렇게 포트레이트부스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사족이 길었는데, 매년 하나씩 내던 정규앨범을 그 해에도 어김없이 구상하던 중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 일상을 음악으로 남겨보자 마음먹었다. 포트레이트부스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된 주제는 바로 작업실이다. 작업실이라 함은 집이 될 수도 있고 새로 만난 포트레이트부스도 포함되었다. 일이 끝나면 노트북과 모니터링 헤드폰을 여기저기 들고 다니며 열정 하나로 채워갔다.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 작업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집이자 작업실인 작은 자취방에서 맞이하는 아침해. 소중한 인연인 포트레이트부스라는 공간에서 받은 인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과 색, 좋아하는 시간, 항상 나에게 영감을 주는 달과 떼려야 뗄 수 없던 불면증까지. 문득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이 공간과 기억들을 꼭 간직해두고 싶었다. 그렇게 하나씩 쌓아가 만들어진 앨범이 바로 <Atelier>이다.
이 책을 통해 김준혁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고 작곡가 청월령으로썬 어떤 곡을 만드는지 궁금하다면 자신 있게 정규앨범 <Atelier>를 추천한다.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음악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총 아홉 곡의 연주음악으로 구성되며 앞에서 설명한 요소들을 빠짐없이 순서대로 표현해 냈다. 시간의 흐름과 전체의 기승전결을 매우 신경 써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니 가능하다면 꼭 모든 트랙을 순서대로 들어봤으면 좋겠다. 돈 벌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