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인문학 :칸트에 대한 이해
오늘은 조금은 무겁지만 가볍게 칸트 철학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삶과 관련해서 칸트(Kant)와 헤겔(Hegel)은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우리 인간은 모순적인 삶을 많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을 받습니다. 그런데 왜 꼭 일관적이어야 할까요? 일관적이지 않다는 말은 삶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 이성은 “원리” 즉, “정의로움”을 추구하지만 실제로 원리적 즉, 정의롭지 않은 감정적 모습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가에 만연해 있는 복사 문제를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원리는 원서를 사서 보는 것이지만 복사집에 원서를 맡기고 복사해서 씁니다. 저작권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비싸지만 원서를 사서 보는 것이 원리 원칙입니다. 원리 원칙이 먼저이지만 복사해서 쓰는 감정이 먼저가 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순간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원리원칙에 따라서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성모의 <가시나무>라는 노래 가사 중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자기 속에 이질적인 자기가 있습니다. 칸트(Kant)는 이 두 개의 세계는 원리와 감정의 서로 다른 세계라고 말합니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영혼과 육체를 송과샘이라는 것으로 묶어 일원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칸트(Kant)는 이 두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지 않고 따로따로 놔둡니다.
칸트는 이 두 가지가 서로 갈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현실적”입니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와 ‘좀 더 자야 한다.’ 사이의 간극(모순)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 모순을 극복해서 하나로 가려고 합니다.
칸트식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은 순수 원리(Ding An Sich: 사물 그 자체)와 이해타산 사이의 모순에 빠져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순수 원리 자체인 ‘그 자체로 사랑해 달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는 “돈, 즉 경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결혼은 “사랑 자체”보다는 많은 계산을 해서 하게 됩니다.
칸트는 순수 원리는 “순수 이성”에서, 이해타산은 “실천이성”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순수 이성”은 인간이 도달 가능한 경험적 지식체계인 지식 세계만을 다루는 반면에 “실천이성”은 경험 밖의 행해야 할 것에 관해 논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존엄해 지기 위해서는 또 그 존엄성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실천이성이 필요합니다.
칸트는 인간은 야만적인 “경향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도덕적인 원리나 판단(이를 정언명법이라 합니다)이 없으면 이기적이고 경향성을 띤 동물이 되어 야만적이게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진짜 순수 원리 자체를 지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순수”해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실천이성에 대한 고려를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