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거짓말, 임밍아웃

전시회 티켓보다 값진 카드

by 매일의 푸

남편은 감정표현에 서투르다.

(사실 서투르다 생각한 적이 없는데 적다 보니. 서투르단 말 외에 현할 길이 없다.)

'임신에 성공하면 남편이 울컥하거나 격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한 적이 있다.

임테기 두 줄로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밤, 들떠있는 나와 달리 남편은 개를 갸우뚱하면서 두 줄 믿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에게 좀 더 진해진 임테기를 보여주자, "진짜 보이네" 하고 신기해긴 했지만,

기대하던 '풍부한 감정 표현' (웃거나 울거나) 따위는 아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예상대로 '노잼'을 선사한 남편은, 녁에 미리 잡혀 있던 약속 간다고 했다.

퇴근하고 오니 남편은 없었지만, 신 집안에 온기가 가득했다.

냄비에는 따뜻한 소고기뭇국이 있었,

냉장고에는 구이용 소고기, 요거트, 과일이 채워져 있었고, 식탁에는 먹기 좋게 뜯어놓 과자가 있었다.

우렁신랑의 짓이다.

이렇게 남편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감동을 주는 사람이다.

남편이 의도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이게 바로 내가 남편에 토라지지 않는 이유이자,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남편만의 비법이다.




공교롭게도 임테기에서 두 줄을 본 날로 이틀 뒤는 설 연휴였다.

양가 부모님을 모두 뵙는 명절이라 임신 사실을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우리는 고민 끝에, 모님들께는 병원검진 후에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초기에는 산부인과 갈 일이 잦았다.

나는 엄마와 매일 통화할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지만, 이 중요하고 큰 일만은 아직 비밀었다.

5주 차에 아기집을 보았고 7주 차에 심장소리를 들었다.

감사하게도 아가의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고 강하게 뛰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이 우리가 선택한 임밍아웃의 때였다!

양가에 드릴 게 있다고 주말에 들리겠다고 하니, 뭘 주려는 건지 갑자기 왜 오려는 건지 꼬치꼬치 물어서 둘러대는데 여간 곤란 게 아니었다.




우리는 먼저 친정 가기로 했다.
부모님과 함께 찾은 식당에서 식사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남편과 오가는 눈 맞춤 안에 ‘지금 할까? 아니야, 조금만 더’라는 신호가 오갔다.

나는 누군가 속이고 놀라게 하는데 취미도 없을 뿐더러, 그런 영화조차 보지 못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 설레잖아!


엄마가 수저를 놓는 순간이, 우리가 기다리던 신호였다.


"남편 회사에서 전시회 티켓이 나왔어.

한 번 열어봐."


엄마는 내가 건넨 '오늘의 거짓말'을 의심 없이 받아 들었다.

두근두근!

엄마가 꺼낸 드에서 깜찍한 용 캐릭터가 까꿍!

또 열어본 카드 안에서는 흑백의 초음파 사진이 까꿍! 하고 인사했다.


"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


카드를 읽은 엄마의 눈동자가 감격에 젖어 들렸다.

처음 보는 모습에 내 마음도 덩달아 렁였다.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묻지 못했지만, 순간 만감이 교차 듯 보였다.

아마 나를 낳았던 그 순간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축하와 걱정을 뒤로하고 시댁으로 향했다.

엄마와 산부인과 다니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부모님과는 자녀계획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반응이 어떨지 더욱이 예상되지 않았다.


심장이 목까지 차올라 쿵쿵거려서였을까.

그날따라 어머님이 과일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우리는 그다지 창의적이지 못해서 친정과 같은 방법을 썼다.


남편이 봉투를 내밀었다.

티켓을 가장한 카드를 열어본 어머님은 깜짝 놀라며, "어머!"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고 나를 꼭 안아주셨다.

"너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하시며 생각보다 더 많이 울고, 많이 좋아하셨다.

아마 '그럴 리가 없다'는 말에는 '쟤들이 딩크로 살 것 같진 않은데..'라는 어머님의 바람과 기대가 겨있던 것 같다.

우리도 빨리 소식을 전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임신준비 과정이 있었지만,

https://brunch.co.kr/@jwsy/9

https://brunch.co.kr/@jwsy/12

그 사정을 알 리 없는 어머님은 궁금해도 혹시 부담되지 않을까 싶어 묻지도 못하고 얼마나 애타셨을까 싶었다.


어머님은 참 좋은 시어머니다.

금전적, 정서적으로 감사한 부분이 참 많은데 몇 가지만 적어보자면, 어머님은 생일 때마다 용돈봉투에 꼭 애정 담긴 편지를 함께 넣어 주셨고, 종종 집으로 먹거리를 내주셨다.

직접 가져다주실 때는 나를 배려해서 집에 들르지 않고 아파트 앞에서 전달만 하고 가셨, 재료를 배달시켜주실 때도 있었다.

<감동받아서 저장해 둔 대화>


'시어머니'는 소에 이렇게 잘해도 며느리 불편할까 살펴야 하는 자리가.

'며느리 역할도 어렵지만 좋은 어른 노릇하는 것은 더 어렵겠다' 생각이 들었다.

임밍아웃을 기점으로 나는 느리와 계를 유지하기 위한 어머님의 노력을 더 이해하게 되었.

그래서 그 마음을 알고, 살펴드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하루에 두 번이나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누구도 왜 거짓말을 했는지 추궁하거나, 회사에서 나왔다던 전시회 티켓 행방을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우리가 드린 카드는 그 어떤 전시회 티켓보다도 값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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