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고란巖高蘭 시로미, 회檜 구상나무, 사향초麝香草 백리향
내가 여러 차례 제주도를 여행했지만 지금껏 한라산을 정상까지 오른 것은 한 번 뿐이다. 10여년도 훨씬 전에 성판악코스로 회사 행사의 일환으로 단체로 백록담에 올랐던 적이 있다. 한라산 정상부는 날씨를 종잡을 수 없고 백록담 보기가 쉽지 않다고 하지만 나는 그때 맑은 날씨 덕분에 백록담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언젠가 어린 아들을 이끌고 영실코스를 초원지대까지 오른 기억도 난다. 지난 4월의 영실코스 등산은 정상까지는 아니지만 1500미터 고지 이상을 오른 세번째 한라산 등산이었는데, 식물애호가로서 등산로 주변의 수목을 관찰하면서 오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이번 영실코스행은 시로미나 눈향나무, 구상나무 등 한라산 고산지대에 자라는 나무들을 자생 환경에서 처음 감상할 수 있어서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영실코스를 다녀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고원에서 낮게 포복하며 자라는 시로미와 눈향나무 풍경은 눈에 선하다. 최근에 서가에서 옛날에 읽었던, <백두산근참기 -한국걸작 기행문 23선>을 꺼내어 살펴보았다.* 혹시나 유명 문인들의 기행문에 내가 감상한 식물들이 등장하지 않을까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 기행문 선집에는 정지용鄭芝溶(1902~1950)과 이은상李殷相(1903~1982)이 일제강점기에 한라산을 오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역시나 한라산 식물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먼저 정지용의 다도해기를 읽어보았다.
“해발 1,950미터이요 이(里)수로는 60리가 넘는 산꼭두에 천고의 신비를 감추고 있는 백록담(白鹿潭) 푸르고 맑은 물을 고삐도 없이 유유자적하는 목우(牧牛)들과 함께 마시며 한나절 놀았읍니다. 그러나 내가 본래 바다 이야기를 쓰기로 한 것이오니 섭섭하오나 산의 호소식은 할애하겠읍니다. 혹은 산행 120리에 과도히 피로한 탓이나 아니올지 내려와서 하룻밤을 잘도 잤건마는 축항부두(築港埠頭)로 한낮에 돌아다닐 적에도 여태껏 풍란(風蘭)의 향기가 코에 알른거리는 것이요 고산식물 암고란(岩高蘭) 열매(시로미)의 달고 신맛에 다시 입안이 고이는 것입니다.” - 정지용/다도해기/목포-제주 뱃길 중에서, p.292
정지용이 1938년에 쓴 기행문에서 시로미를 발견해서 무척이나 기뻤다. 시로미의 한자명칭을 ‘암고란巖高蘭’으로 적고 있구나!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에서도 시로미(Empetrum nigrum, ガンカウラン)의 한자명으로 암고란을 채록하고 있다. 시로미의 현재 중국명도 암고란이다. 물론 시로미는 조선식물향명집 저자들이 제주도 방언을 채록하여 식물명으로 채택한 것이다. 석주명石宙明(1908~1950)의 <제주도방언집>**에도 시로미가 제주어 ‘시러미’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같은 책 수필 부분에서 “시로미:제주어로는 ‘시러미’ 일명은 ‘ガンカウラン’ 암고란과(岩高蘭科)에 속하는 고산식물. 왜소한 관목(灌木)이고 군생(群生)한 곳엔 융단(絨緞)을 깐 것 같다. 하절에 자흑색의 열매가 많이 열리고 미미(美味)이다. ‘들쭉’보다 못 하지 않을 것이니 공업화시킬 정도의 분량은 못된다. 냉증에 약효가 있다 하며 진시황이 구해간 불로불사의 약이란 것도 이것으로 생각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부에서 시로미(시러미)의 일본어 기원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석주명이 시로미를 당시 일본어로는 ‘간카우란(ガンカウラン)’이라고 불렀다고 했고, <일본식물도감>에서도 시로미의 일본명을 ‘간카우란(ガンカウラン)’하는 한 것으로 보아, 제주 사람들이 일본어가 상용되면서 ‘시러미’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지는 않다. 정지용이 맛을 보고 입안에 침이 고인다고 말한 것처럼, 나도 언젠가 달고 신 ‘시러미(시로미)’ 열매 맛을 보고 싶다.
이은상의 1937년 ‘한라산등척기’에는 시로미가 한자명 ‘암고란’으로 상당 분량으로 소개되어 있다. 흥미진진한 내용이라 이은상이 한라산 식물상을 설명한 부분을 다음에 인용한다.
“이 한라산의 식물수는 142과(科) 1,317종(種), 116변종(變種)이요, 그중에 78종 69변종이 특산인데 이것을 다른 명산과 비교하면 백두산의 490종, 금강산의 772종쯤은 문제도 되지 않으며 일본 부사산(富士山)의 1천 종이나 상근산(箱根山)의 1,188종까지도 우리 한라산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저 불인(佛人) '타게·포리' 등에 의하여 채집된 식물이 영(英), 독(獨), 오(墺), 서(瑞)의 제학자에게 특수한 연구자료가 되어 세계적으로 우리 한라산 식물이 성가를 높인 것이다.
이것도 내게는 자랑스러워 배가 절로 나오고 어깨가 절로 솟음을 어찌하지 못하면서 전문가의 뒤를 따르며
“이것은 암고란(岩高蘭).”
"저것은 진달래의 군락(群落)이요."
"또 이것은 들쭉."
"저기 저것은 구상나무."
하는 강의를 즐거이 듣는 것이다.
…
전부가 회림(檜林)인데 뭉기는 구름 걷히는 안개 속에 은현자재(隱顯自在)한 장관 미관은 굴곡 없는 적막한 고원머리에 군림한 성자(聖者)시매 바라보는 그대로 탄앙(嘆仰)의 부르짖음을 참을 수 없다.
돌아내려 구름 속에 끝을 잠근 병장연봉(屏嶂連峰)을 바라보면서 그대로 고원의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는 길에 일행은 숨차고 피곤함도 알지 못하고 연방 허리를 굽혀 암고란의 열매를 따먹기에 바쁘다.
암고란의 열매는 팥알만큼씩 한 새까만 열매인데 머루 다래 맛이 난다. 고원 전면이 온통 암고란의 열매라 따먹어도 따먹어도 흔하고 푼푼하고 남고 처진다.
이 열매를 따다가 성내로 들어가 팔기까지 하는 것인데 냉증에 약효가 있다는 말에 일행은 더욱 탐하여 한 줌씩 반 줌씩 털어 넣어 입술마다 검은 물 든 것을 서로 보고 웃는 것이다.
인정이 돌과 같이 차고 사랑이 얼음같이 찬 이에게도 이 암고란 열매가 정열의 약효를 낸다 하면은 나부터 일두(一斗) 이석(二石)을 사양치 않아야 하려니와 저 아래 차운 세상에 이 냉증 고치는 열매를 대량으로 무역할 일이 아니겠느냐고 이야기하다 말고 다시 허허 웃는 것이다.
땅따리 암고란(巖高蘭)에
동글동글 매친열매
차운병(病) 낫는다기
나도한입 넣거니와
저아래 얼음세상을
고쳐볼까 하노라+
그 곁에 사향초(麝香草)의 자화(紫花) 떨기는 암고란의 뭇 총각 사이에 서서 총애를 한몸에 입는 처녀와도 같다. 구태여 풍기려 하지 않건마는 저 절로 풍기는 청향(清香)이 행인의 눈썹에 웃음을 흔들어 놓고 제라사 도로 수줍어 흰 나비 날개보다 더 부드럽고 얇은 화판(花瓣)으로 제 얼굴을 가만히 덮는 것은 반드시 지나가는 바람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 이은상/한라산등척기 중에서, pp.341~343
고원 전면이 온통 암고란 열매라서 따먹고 따먹어도 남아 넘친다니! 상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이은상이 한라산에 오른 때는 1937년 7월 28~29일 양일간이라고 하는데,**** 이때에는 제주도 식물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후라서인지 이은상은 식물에 대한 상당히 많은 지식을 풀어놓고 있다. 포리 신부와 타케 신부가 제주도 식물 표본을 채집한 사실과 그 의의에 대해서는 당시 상당수 지식인들이 모두 알고 있었던가 보다.*****
암고란 시로미, 구상나무 등 얼마 전 영실코스를 오를 때 감상했던 식물명을 이은상의 1937년 글에서 만나니 반가울 뿐이다. 당시에는 이미 구상나무(Abies koreana)가 우리나라 특산종임을 많이들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한라산 순례팀의 식물전문가가 ‘구상나무’를 외쳤을 것이다. 이 구상나무 숲을 이은상은 한자로 ‘회림檜林’으로 표현하고 있다. 구상나무를 한자로 ‘제주백회濟州白檜’라고 하고, ‘회檜’는 우리 고전에서 보통 전나무(Abies holophylla)를 뜻했다. 구상나무가 전나무와 같은 Abies속에 속하니, 구상나무 숲을 ‘회림檜林’으로 표현한 것도 충분히 이해된다.
뭇 총각 시로미들 사이에서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처녀로 표현한, 자주색 꽃이 피는 사향초麝香草는 무엇일까? 시로미 열매가 익을 무렵은 여름철이고, 이은상이 한라산에 오른 때는 7월 말이다. 한방에서는 백리향(Thymus quinquecostatus)을 사향초라고 한다. <중약대사전>에서는 타임(Thymus vulgaris L.)의 중국명을 사향초라고 했지만 타임은 우리나라에 자생하지 않으므로, 국내자생하는 백리향도 사향초로 부르는 듯하다. <한국의 나무>에 따르면 백리향은 국내 분포지가 강원, 경남, 경북의 산지 바위지대이며, 낙엽 소관목이며 가지가 많이 갈라지고 땅위를 기며 자란다. 6~8월에 연한 자색-홍자색의 꽃이 가지끝에 머리모양으로 모여 달린다. “흰 나비 날개보다 더 부드럽고 얇은 화판(花瓣)으로 제 얼굴을 가만히 덮는”다는 표현은 가지끝에 머리모양으로 모여 달리는 백리향 꽃을 묘사한 듯하다.
제주도 고산지대에 백리향이 자라는지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라산 식물을 조사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눈향나무-털진달래군집은 해발 1,540m 이상의 풍충지의 표토가 낮은 암석지에 발달하는데, 눈향나무와 털진달래를 비롯하여 좀새풀, 애기솔나물(Galium pusillum) 산철쭉, 백리향(Thymus quiquecostatus), 구름떡쑥 등이 높은 빈도로 출현한다.”******라고 한 것으로 보면 제주도 고산지대에 백리향이 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구태여 풍기려 하지 않건마는 저절로 풍기는 청향(清香)이 행인의 눈썹에 웃음을 흔들어” 놓는 사향초는 꽃 이름처럼 향기가 백리는 간다는 ‘백리향’이 틀림없을 것이다. 한라산을 같이 등반한 어느 식물전문가가 이은상에게 소리쳐 알려준 ‘들쭉’, 내 버킷리스트에 들어있는 이 자생환경의 들쭉나무를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올해가 가기전에, 한라산이 어려우면 설악산에라도 올라서 들쭉나무를 꼭 감상하고 싶다. 물론 한라산등척기를 읽은 다음에는 자생지의 백리향을 만나 향기를 음미하는 것도 나의 버킷리스트에 들어가게 되었다.
<끝 2025년 5월>
*최남선 외 14인, 백두산근참기 - 한국걸작 기행문 23선, 조선일보사, 1989
**석주명, 제주도방언집, 서귀포문화원 연구총서 IV-1, 서귀포문화원, 2008.
***상게서 p.524
****정승철, 제주방언연구, '외지 출신 문인의 제주도 기행문 - 1930년대 신문 연재물을 중심으로', 태학사, 2024, p.463
*****정홍규, 에밀 타케의 선물 – 왕벚나무에서 생명의 숲을 찾다, 다비치, 2019
******제주학연구센터, 한라산의 식물, 한라산 총서 IX. (http://jst.re.kr/)
******* 제주도 고산 식물 중 7~8월에 자주색 꽃이 피우는 것에는 백리향 외에도 섬잔대(Adenophora taguetii), 섬쥐손이(Geranium shikokianum var. quelpaertense)도 있다. 섬잔대나 섬쥐손이 꽃은 충분히 총각들이 어여쁜 처녀인냥 사랑할만하지만, 향기에 대한 묘사로 보아 사향초는 백리향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겠다.
+표지 : 시로미 (2025.4.5 한라산 영실코스)
+제주학연구센터 제공 <탐라기행한라산>(1937, 조선일보사) 영인본을 참조하여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