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양(赤楊), 유리목(楡理木), 기목(榿木), 오리목(五里木) 용례검토
문헌과해석에 기고했던 글 '적양(赤楊), 유리목(楡理木), 기목(榿木), 오리목(五里木) 등 오리나무 한자 용례 검토 - 조선시대에 5리마다 오리나무를 심었을까'이 <문헌과해석 97호(2024년 가을호)>에 묶여져 출판되었다.* 이 글은 전래 나무타령에 "십리 절반 오리나무"를 흔히 5리마다 오리나무를 심었다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서, 조선시대 문헌 검토를 통해 실제로 5리마다 심었는지 사실 여부를 검토한 것이다. 아울러 오리나무의 한자명 표기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물론 결론은 오리나무는 5리마다 심지 않았으며, 대신 왕릉 등 저습지에 심은 나무이며, 주로 오리나므는 조선시대에 기목(榿木) 또는 오리목(五里木)으로 표기되었다. 브런치에 기록으로 남긴다.
"나는 『승정원일기』나 『일성록』의 기록처럼 왕릉의 저습지에 정말로 오리나무를 심었는지 궁금했다.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던 지난 5월 어느 날, 이를 확인하기 위해 화성의 융건릉을 방문했다. 정조대왕의 건릉을 먼저 관람한 후 사도세자의 융릉으로 갔는데, 입구부터 소나무 숲이 그윽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혹시 오리나무가 보이는 지 좌우를 살피면서 걸었는데, 상수리나무 숲길을 지나 건릉에 도착할 때 까지는 겨우 두세 그루를 만났다. 다시 소나무 숲 길을 걸어 융릉에 도착하니 역시나 『일성록』의 기록을 증명이나 하듯이 오리나무 고목들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나뭇잎의 잔 톱니를 확인하고 수피를 살폈다. 1811년에 심은 나무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령이 상당한 고목이었다. 융릉에서 다시 입구로 나가면서는 거의 숲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한 오리나무 군락도 감상할 수 있었다."**
<끝, 2025.4.26>
*문헌과해석, 통권97호(2024년 가을호), 태학사, pp.185~202.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3016842)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scholardetail/product?cmdtcode=4010071439375)
**상게서, p.195
+오리나무 군락 (2024.5.6 화성 융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