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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옥션 능호관 이인상 시고와 ‘꾸지나무 곡榖'에 대하여

곡榖과 곡穀의 혼용 사례와 꾸지나무 향명 유래

by 경인


지난 4월 하순 나는 칸옥션 제37회 미술품경매에 출품된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1831~1879)의 <천죽재시화첩天竹齋詩畵帖>을 감상하기 위해 전시회에 갔다가 경매 작품들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도록을 구했다. 이 도록에는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이 『시경』 소아의 시 ‘학이 우니 (鶴鳴)’를 전서체로 쓴 시고가 소개되어 있었다. 이 작품을 살펴보다가 이인상이 ‘꾸지나무 곡 (혹은 닥나무 곡)’을 ‘곡穀’으로 잘못 쓴 것을 발견했다. 바로 “청단靑檀도 심어져 있고, 그 아래에 꾸지나무도 있네 (爰有樹檀 其下維榖)”의 나무 목 변의 ‘꾸지나무 곡榖’을 벼화 변의 ‘곡식 곡穀’으로 쓴 것이다.


칸옥션-이인상시고2.jpg 칸옥션 제37회 미술품경매 도록의 능호관 이인상 시고 중에서 - 3째 줄 첫 글자 곡穀


사실 나도 2023년 8월에 출간한 졸저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에서 ‘꾸지나무 곡’을 ‘곡穀’으로 잘못 썼다. 부록 ‘한자 식물명 일람표’에서 “곡穀 꾸지나무 Broussonetia papyrifera”라고 기재한 부분이다. 나는 몇 달 전에 반부준의 『시경식물도감』을 살펴보다가 Broussonetia papyrifera를 부수部首가 ‘나무 목木’인 ‘곡榖’자로 표기한 것을 보고 졸저의 오류를 알게 되었다. 알고 나니, 나무를 뜻하는 글자의 부수가 ‘벼 화禾’라는 것은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 생각을 책 교정을 볼 때에는 미처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가, 조선시대의 유명 서화가 이인상의 시고에서도 같은 실수를 발견한 것이다.


꾸지나무-20230917-안동.jpg 꾸지나무 잎 (2023.9.17 안동 고향마을)
닥나무-암수꽃차례-20140503-섬진강.jpg 애기닥나무(B. monoica) 암수한그루의 암꽃차례와 수꽃차례 (2014.5.3 섬진강)


현대에 출간된 몇몇 시경 해설서들에서도 ‘기하유곡其下維榖’의 ‘곡榖’을 ‘곡穀’으로 쓰고 있었다.* 아마도 ‘꾸지나무 곡榖’자와 ‘곡식 곡穀’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문헌에서는 이 글자가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훈몽자회』를 보니, “構 닥 구, 일명 곡糓”이라고 하여 ‘곡榖’ 대신 곡糓(=穀)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부터 ‘곡榖’을 ‘곡糓(=穀)’과 혼용했던 것일까?




PA10D-6C_001_訓蒙字會_훈몽자회(123)_페이지_021_이미지_0001.jpg 조성광문회 판 훈몽자회의 닥나무, 저/구/곡 (장서각 제공)


그러나 목판본 『시경언해』에서는 ‘곡榖’으로 바르게 표기하고 있다.** 장서각 소장 명나라내부각본 『시경대전』에서도 분명히 ‘곡榖’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글자의 의미로 보아 ‘꾸지나무 곡’은 틀림없이 부수가 ‘나무 목’인 ‘곡榖’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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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유곡其下維榖' 표기 - (좌) 목판본 시경언해, (우) 명나라 내부각본 시전대전 (장서각 이미지)


지금껏 꾸지나무를 뜻하는 한자가 무엇인지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정작 ‘꾸지나무’가 어떤 나무일까 궁금해하시는 분이 있을 듯하다. 품질이 우수하기로 유명한 우리나라 한지韓紙를 만드는 ‘닥나무’는 누구나 잘 알 것이다. 꾸지나무가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닥나무로 부르는 나무들 중 하나이고, 지금도 안동과 전주 지방에서 한지를 만드는 주요 재료로 사용되는 나무이다. 나는 2019년 여름에 한지를 생산하는 안동한지 공장을 견학했는데, 이때 어린 시절 ‘닥나무’라고 불렀던 나무가 ‘꾸지나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식물도감에서 왜 ‘닥나무’를 ‘꾸지나무’로 명명했는지 궁금하여, <껍질로 한지를 만드는 꾸지나무와 닥나무 - 저楮와 곡榖>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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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지나무 암수딴그루 (좌) 수피와 암꽃차례 (2021.5.23 변산), (우) 수꽃차례 (2019.5.4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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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나무 밭 (좌)와 닥나무 암꽃차례 (우), 2025.5.27 안동 가송


닥나무(Broussonetia x kazinoki)와 꾸지나무(B. papyrifera)는 같은 속(genus)에 속하며 모두 한지 제조에 사용되는 나무이다. 전통시대 우리나라에서는 닥나무와 꾸지나무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닥나무’로 불렀으며, 한자로는 ‘곡榖’보다는 ‘저楮’로 표기했다. 즉, 닥나무라는 이름으로 ‘B. papyrifera’와 ‘B. x kazinoki’ 두 종의 나무를 혼용하여 가리키다가,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에서 학명에 대응하는 향명을 정할 때 비로소 두 나무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즉 향명집을 저술한 식물학자들이 뽕나무과 닥나무속(Broussonetia)에 속하는 두 종의 나무에 같은 이름을 부여할 수 없어서, 전남 지방 방언 ‘꾸지나무’를 B. papyrifera의 향명으로 채용하고, ‘닥나무’는 ‘B. x kazinoki’의 향명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 중국에서는 꾸지나무를 저楮, 저상楮桑, 곡榖, 상곡桑榖, 구構 등으로 표기하고, 닥나무는 저楮 혹은 소구수小構樹로 표기한다. 특기할 점은 중국에서도 저楮는 닥나무와 꾸지나무를 모두 가리키는 글자지만 곡榖이나 구構는 주로 ‘꾸지나무’를 뜻한다.++


꾸지나무-20190723-안동-풍산.jpg 꾸지나무 (2019.7.23 안동 풍산)


이제 꾸지나무가 한지를 만드는 중요한 나무임을 상기하면서, ‘꾸지나무 곡榖’이 나오는 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시를 읽어보자. 『시경』 소아小雅 홍안지습鴻雁之什 편의 ‘학이 우니 (鶴鳴)’이다. 이가원 번역을 바탕으로 식물명은 일부 수정했다.*****


鶴鳴于九皐 높은 언덕에서 학이 우니

聲聞于野 그 소리가 들판에 들리네.

魚潛在淵 물고기가 깊은 연못에 잠겼다가

或在于渚 이따금 물가로 나오기도 하네.

樂彼之園 즐거운 저 동산에는

爰有樹檀 청단靑檀도 심어져 있고

其下有蘀 그 아래에 낙엽이 있네.

它山之石 다른 산의 돌로

可以為錯 이 산의 돌을 가는 숫돌을 삼는다네.



鶴鳴于九皋 높은 언덕에서 학이 우니

聲聞于天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리네.

魚在于渚 물고기가 물가에 있다가

或潛在淵 이따금 깊은 연못에 잠기기도 하네.

樂彼之園 즐거운 저 동산에는

爰有樹檀 청단靑檀도 심어져 있고

其下維榖 그 아래에 꾸지나무도 있네.

它山之石 다른 산의 돌로

可以攻玉 이 산의 옥을 갈 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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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호관 이인상의 전서체 시고, 鶴鳴 (칸옥션 제37회 미술품경매 도록)


칸옥션 미술품경매에 출품된 이인상 시고는 이 ‘학명鶴鳴’의 둘째 구절을 쓴 것이다.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지막 줄의 ‘옥玉’ 아래에 작을 글씨로 ‘재在’가 쓰여 있다. 그리고 셋째 줄의 ‘잠潛’ 옆에는 점(.)이 찍혀있다. 이것은 이인상이 ‘재在’를 써야 할 곳에 실수로 ‘잠潛’을 쓴 것을 알고 수정 표시를 해 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는 이인상의 낙관이 없는데, 아마도 이런 점을 감안하여 낙관을 찍지 않은 것이 아닐까? 『시전대전』에서는 이 시의 곡榖에 대해 “곡榖. 일명 저楮로 나쁜 나무이다. … 지금 강남 사람들이 그 껍질로 길쌈을 하여 베를 짜고, 찧어서 종이를 만든다. 수피가 얼룩진 것이 저楮이고 흰 것이 곡榖이다.”******라는 주석을 달고 있다.즉, 곡榖(꾸지나무)을 청단靑檀(Pteroceltis tatarinowii)*******보다 나쁜 나무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곡榖은 동양에서 종이를 만드는 주요 원료로 사용됨으로써 인류 문명 발달에 크게 공헌한 소중한 나무이다. 이렇게 소중한 나무를 뜻하는 글자이니, 졸저의 오류도 다음쇄에서는 꼭 “곡榖 꾸지나무 Broussonetia papyrifera”로 바로잡아야겠다.

<끝>


*(1)김혁제 교열, 원본집주 시전, 명문당, 1988. (2) 이기동 역해, 시경강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4. 등 (참고- 정학유 지음, 허경진 김형태 옮김, 시명다식, 한길사, 2007에는 ‘꾸지나무 榖’자가 제대로 쓰여있다.)

**『시경언해』의 글자 모양을 보면 ‘민 갑머리(冖)’ 밑에 ‘禾’를 쓴 것으로 보이지만, 획수로 보아 민갑머리(冖)밑에 ‘一’자를 쓰고 그 밑에 ‘木’을 쓴, 즉 ‘榖’자를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곡식 곡穀’자는 민갑머리(冖) 밑에 ‘一’자를 쓰고 그 밑에 ‘禾’를 쓴다.

*** 안동에서 ‘닥나무’라고 부르는 나무가 ‘꾸지나무’임을 알고 쓴 브런치 글 <껍질로 한지를 만드는 꾸지나무와 닥나무 - 저楮와 곡榖> 참조 (https://brunch.co.kr/@783b51b7172c4fe/38)

****정태현의 『조선삼림식물도설』을 보면, B. papyrifera의 조선명으로 전남全南에서 ‘꾸지나무’, 남선南鮮에서 ‘닥나무’ 등 두 가지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B. kazinoki의 조선명으로는 ‘닥나무’ 하나만 기록하고 있다. 현재에는 B. kazinoki를 꾸지나무와 애기닥나무(B. monoica)의 교잡종으로 보고 있으며,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한국의나무>(개정신판 3쇄 2020.9.30)의 견해에 따라 학명은 B. x kaninoki로 쓴다. 국립수목원 발간 <국가표준식물목록>(2021)에는 닥나무의 학명을 B. x hanjiana M.Kim으로 달고 있으나, KEW와 The World Flora Online에서는 B. x hanjiana M.Kim를 Broussonetia x kazinoki의 synonym으로 보고 있다.

*****리가원,허경진 공찬, 시경신역 – 풀어쓴고전3, 청아출판사, 1999

****** 榖 一名楮 惡木也 … 今江南人績其皮以爲布 擣以爲紙 樹皮斑者是楮 白者是榖 – 詩傳大全/小雅/鴻雁之什/鶴鳴

******* 시경의 단檀을 대개 질기고 단단한 나무라는 뜻의 ‘박달나무’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학자들은 단檀을 중국명 청단靑檀, 학명 Pteroceltis tatarinowii인 나무로 설명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테로셀티스’로 부르기도 한다. 천리포수목원에 있다.


+표지사진- 꾸지나무 암그루에 핀 암꽃차례 (2021.5.23 변산)

++ 꾸지나무로 만든 종이를 한자로 곡지榖紙 혹은 구지構紙라고 할 수 있겠다. 혹시 ‘곡지나무’, ‘구지나무’가 ‘꾸지나무’의 어원이 아닐까? 페친이신 노영식 선생님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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