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ccinium hirtum var. koreanum, 紅果越橘
지난 5월 18일, 19일 양일간 식물탐사 동호인들과 함께 설악산을 다녀왔다. 한계령에서 출발하여 끝청, 중청을 지나 희운각대피소에서 하룻밤 묵고, 천불동계곡을 거쳐 설악동으로 하산하면서 식물을 감상했다. 내심 설악산 고산의 바위 지대에 자란다는 들쭉나무(Vaccinium uliginosum L.)를 볼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들쭉나무는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설악산행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가 걸었던 길 중 가장 아름답고 멋진 길로 기억에 남을 듯하다.
애기금강제비꽃, 뫼제비꽃, 분비나무 암/수구화수, 이노리나무, 배암나무, 눈향나무, 눈측백, 눈잣나무, 댕댕이나무 등 귀한 식물들을 만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감상하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며 걸었더니, 중청을 지났을 때에는 벌써 오후 5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청명한 날씨였다. 고산지대 분비나무 숲 아래에서 부드러운 저녁 햇살을 받아 빛나는, 털진달래 꽃이 만발한 모습은 그야말로 천상의 화원이었다. 중청에서 소청으로 넘어가는 능선길에서 바라본 공룡능선과 천불동계곡, 그 너머 울산바위 모습도 산수화의 한 장면이었다. 마치 얼마전 감상한 정선의 ‘단발령망금강산’ 그림 속에 내가 들어가 단발령에 서서 눈 앞에 펼쳐진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바라보는 듯하다고나 할까? 이런 풍경들을 보고 나니 들쭉나무를 못 본 아쉬움은 스르르 녹아내렸다. 오히려 두 다리가 성할 때, 들쭉나무 꽃이며 잎을 제대로 감상할 때까지 몇 번이고 설악산을 다시 오르며 멋진 풍광을 즐기리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한밤중에 깨어 희운각대피소 마당에서 바라보았던 별이 총총했던 하늘은 이번 식물탐사 길을 축하하는 듯했다. 둘째 날도 바람이 세었지만, 살짝 흐린 날씨에 식물 감상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공룡능선을 오르는 대신 천불동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은 여유로운 유람 길이었다. 희운각대피소 아래 계곡 가에 큰 키로 자라는 우람한 쪽버들 감상을 시작으로, 시닥나무, 부게꽃나무, 털개회나무, 만리화, 금강봄맞이, 물참대, 산가막살나무, 함박꽃나무 등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모습을 감상하면서, 담소를 나누며 하산하는 길의 즐거움을 그 무엇에 비유할 수 있으랴!
식물을 살피면서 가파른 산길을 천천히 걸었다. 한참 내려와 천당폭포를 지나기 전, 앞서가던 일행이 산앵도나무(Vaccinium hirtum var. koreanum) 꽃이 피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즉시 카메라를 챙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관목 떨기 푸른 잎사귀 아래 앙증맞게 애기 종 모양으로 피어 있는 산앵도나무 황록색 꽃이 눈 앞에 나타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산앵도나무 꽃을 생애 최초로 보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조금 더 걷다가는 황록색 꽃잎에 세로로 연한 홍색 줄이 있는 꽃도 만났다. 양폭산장을 지나서도 산앵도나무 꽃은 몇 차례 더 눈에 띄어 내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산앵도나무는 2018년 9월 태백산에서 빨갛게 익은 열매 한 알을 단 모습을 본 후, 치악산, 발왕산, 백덕산 등에서 꽤 여러 번 보았던 관목이다. 지난 4월에도 천마산에서 겨울눈에 새싹이 움트는 산앵도나무를 보았다. 그러나 주로 여름이나 가을철에 만났기 때문에 꽃이 떨어진 자리나 열매는 봤지만 지금껏 꽃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시경> ‘상체常棣’ 편은 형제의 두터운 우애를 노래한 시이다. 안동시 풍산읍에 있는 체화정棣華亭이 이 시의 첫 구절 “상체지화常棣之華”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 시에서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꽃으로 등장하는 상체常棣는 현재 우리가 이스라지(Prunus japonica)라고 부르는, 키가 1~1.5m로 자라는 벚나무속(Prunus)의 작은 관목이다.* 그런데 이스라지나 이스랏이 앵두를 뜻하는 옛말이어서 주로 산이나 숲 가장자리에 자라는 이스라지를 산앵도나무로 부르기도 했다** 즉 현재 식물도감의 식물명이 정착되기 전에는 ‘이스라지’와 ‘산앵도나무’라는 이름으로 Prunus japonica와 Vaccinium hirtum var koreanum을 서로 혼용하여 지칭했다. 그러나 '이스라지'와 '산앵도나무'는 이제 엄연히 과(family)가 다른 나무를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체화棣華를 이스라지가 아니라 산앵도나무 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중국식물지> 등을 참조하면, 산앵도나무의 원종인 Vaccinium hirtum의 중국명이 홍과월귤紅果越橘, 혹은 일본월귤日本越橘이며, 이 나무가 속한 속(genus) 이름도 월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Vaccinium속의 나무로 월귤(Vaccinium vitis-idaea)과 넌출월귤(Vaccinium oxycoccos)에 ‘월귤’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어서, 옛 글에서 월귤을 만나면 산앵도나무를 떠올려도 좋겠다.
아무튼, ‘락, 막락혜! 신상지 (樂莫樂兮新相知), 새로이 알게 된 것보다 더 즐거운 건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산앵도나무 꽃을 자생지 현장에서 뜻밖에 처음 만난 것은 그야말로 동지섣달 꽃 본 듯이 기쁜 일이었다.*** 더구나 산앵도나무가 보고팠던 들쭉나무와 같은 산앵도나무 속(Vaccinium) 식물임에랴! 들쭉나무도 감상했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산앵도나무 꽃을 감상한 것만으로도 이번 설악산 탐사 길은 즐거운 추억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함께 걸었던 동호인들을 떠올리며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상체常棣’편을 읊조려본다. '상체常棣'는 지금 ‘이스라지’를 뜻하지만 ‘산앵도나무’로 불리기도 했다.
상체지화(常棣之華) 이스라지 꽃이
악부위위(鄂不韡韡) 환하게 피었네
범금지인(凡今之人) 세상 사람 가운데
막여형제(莫如兄弟) 형제보다 좋은 이 없어라.
<끝>
*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0년 1/2월호에 실린 졸고,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나무 상체常棣가 산앵도나무일까? – 이스라지”에서 상체가 이스라지임을 밝혀 놓았다. 이 글의 초고는 다음 브런치 링크 참조. (https://brunch.co.kr/@783b51b7172c4fe/18)
.** 1943년에 발간된 정태현의 <조선삼림식물도설>에서는 욱리郁李(Prunus Nakaii Leveille)의 조선명으로 이스라지나무, 산앵도나무, 유스라지나무, 오얏 등을 들고 있고, 진달래과의 Vaccinium koreanum Nakai도 산앵도나무, 꽹나무, 물앵도나무로 적고 있다. 참고로 <한국의나무>에 기재된 산앵도나무의 학명은 Vaccinium hirtum Thunb. var. koreanum [Nakai] Kitam.이다.
*** 悲莫悲兮生別離 樂莫樂兮新相知 - 屈原, 楚辭/九歌/少司命
+표지사진 - 산앵도나무 꽃 (2025.5.20 설악산 천불동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