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檜’의 전나무 용례, Abies holophylla
<아언각비>는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선생이 우리나라 속어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지은 책인데, 다음과 같이 '회檜'의 오용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회檜나무는 지금의 이른바 만송蔓松이다. 속칭 노송老松이다. 서리고 얽혀 취병翠屛(생울타리)이나 취개翠蓋가 되는 것이 이것이다. 지금 민간에서 삼목杉木^을 회檜(한글원주: 젓나무)로 잘못 알고 있다. 시인들은 매번 곧은 줄기가 하늘로 뻗은 나무를 보고 회檜라고 읊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 병은 이미 고질이 되어 한마디 말로는 근절시킬 수가 없다.”*
이 글에서 선생은 만송蔓松(향나무)인 ‘회檜’를 ‘젓나무’로 잘못 알고 시를 짓는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에 ‘회檜’가 ‘향나무(Juniperus chinensis)’를 뜻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많은 문인들이 ‘젓나무’를 뜻하는 글자로 사용했던 듯하다. 이는 아마도 <훈몽자회>에서 회檜를 “젓나모 회”로 기록한 것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현대에도 <한국한자어사전>에 “전나무 회”로 되어 있고, 민중서림 <한한대사전>에는 향나무를 뜻하는 “노송나무 회”로 되어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 회檜는 ‘향나무’와 ‘전나무’를 뜻하는 글자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을 읽다가 회檜를 만나면 이것이 향나무인지 전나무인지는 문맥을 통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한자명 식물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나는 이 회檜 자를 만날 때 마다 향나무와 전나무 사이에서 갈등했다. 달포 전 살펴본 이은상의 <한라산등척기>의 회檜는 한라산 정상부에 자생하는 나무이므로 전나무(Abies holophylla) 류인 구상나무(Abies koreana)가 분명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구상나무를 한자로 ‘제주백회濟州白檜’라고 하기도 한다. 이렇듯 글이 지어진 환경이나 묘사, 또는 필자 주석을 통해 확실이 회檜가 어떤 나무인 지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얼마 전 정병설 교수의 <나의 문학 답사 일지>의 ‘옛 서울 나들이'를 읽다가 “고궁의 푸른 소나무와 회나무가 보인다”라는 구절을 만났다. 혜경궁의 오빠인 홍낙인의 ‘피음정기(披吟亭記)’를 인용하여 혜경궁의 친정집이 현 서울공예박물관보다 약간 북쪽 언덕 부근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부분에서였다. ‘회나무’가 무엇일까 궁금하여 원문을 찾아보니 ‘회檜’였다. 원문은 “고궁의 큰 소나무와 늙은 회檜나무가 푸르게 촘촘히 줄지어서 괘안几案을 마주하는 듯하다.”**였다. 이때 회檜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현재 경복궁에는 향나무도 있고 전나무도 있기 때문이다. 단지 문맥상으로 큰 소나무와 촘촘히 줄지어 자라는 모습으로 보아 ‘전나무’일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확증은 없는 것이다.
조선 후기 영남의 학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1738~1816)의 문집에는 ‘계정 앞에 늙은 ‘회檜’ 나무가 있는데, 선조께서 손수 심은 것이라 전해온다. 세월이 오래되어 쇠하고 썩어 가지와 잎이 말라 죽어 가더니, 금년 여름에 갑자기 저절로 넘어졌다. 참으로 두보가 이른바 ‘초당이 이로부터 볼품없겠네.’라고 한 것과 같다. 내가 마음이 아파 7언 고시 약간 구로써 그 일을 읊는다.’***라는 제목이 꽤 긴 장편 시가 한편 실려 있다. 이 시에서 ‘회檜’는 내용을 읽어보면 ‘전나무’임을 알 수 있다.
정종로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의 후손이고, 계정溪亭은 정경세가 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지은 정자라고 한다. 7언 190구나 되는 장편 시라서 나무를 묘사한 부분 일부만 인용한다.
有檜有檜溪亭前 계정 앞의 전나무, 전나무여
故老相傳先祖植 어르신들 전하길 선조께서 심으셨다네
先祖卜築在庚子 선조께서는 경자(1600)년에 터를 잡으셨으니
庚子于今年二百 지금까지 2백년이 되었네
二百年間惟意長 2백년간 오직 자라는데 뜻을 두어
危榦直上干空碧 높은 줄기가 곧게 푸른 하늘로 솟았네
其大蔽牛絜百圍 굵기는 소를 가릴 정도로 백 아름을 헤아리고
其高臨山過千尺 크기는 산을 마주 볼 만큼 천 척尺이 넘네
十仞而後方有枝 열 길 위에나 가지가 있는데
枝蒼葉蔚相重疊 가지와 잎이 서로 겹겹이 우거졌네
向上漸殺竦爲顚 위로 가면서 조금씩 줄어들며 꼭대기가 솟아올랐고
顚抽兩榦如簪揷 꼭대기에 나온 두 줄기가 비녀 꽂은 듯하네
節目繁多脈理正 굳은 마디 많으나 나무 결은 바르고
鱗甲堅厚苔蘚蝕 비늘 껍질 단단하고 두터운데 이끼가 끼었네
…
入洞不問知有亭 마을에 들어오면 묻지 않아도 정자 있는 곳 알고
出洞旣遠猶在矚 마을을 벗어나 이미 멀어져도 여전히 보이네
…
萬木凋落獨也靑 온갖 나무 시들어 떨어져도 홀로 푸르니
정종로는 정경세가 심은 ‘회檜’가 사철 푸른 나무로 곧게 자라는 교목임을 묘사하고 있다. 수형도 묘사하고 있는데, 가지 길이가 위로 갈수록 조금씩 줄어들어 꼭대기가 우뚝해진다고 했다. 키가 얼마나 큰지 사람들이 동네에 들어서면 계정이 어디 있는지를 나무를 보고 금방 알 수 있었고, 동네를 벗어나 한창 가도 여전히 회檜 나무가 보였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정종로가 향나무가 아닌 전나무를 회檜로 지칭했음을 알 수 있다. 향나무는 상록 관목 혹은 교목으로 우리나라에서 키가 보통 10여 미터 정도까지 자라지만, 전나무는 상록 교목으로 높이 30m, 밑둥 지름 1.5m까지 자란다.
정경세가 1600년경에 심은 전나무는 우뚝 높이 자라서 계정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아쉽게도 2백년 세월이 흘러 수명을 다한 전나무는 어느 여름날 온 동네를 진동하는 큰 소리로 넘어져버렸다. 아마도 전나무의 수명이 200여년 정도인가 보다.**** 정종로는 조상이 심은 전나무가 쓰러져버린 아쉬움을, 두보가 초당의 ‘남수柟樹’*****가 비바람에 쓰러진 후 “초당이 이로부터 볼품없겠네 (草堂自此無顔色)”라고 읊었던 고사에 비유했다. 정경세가 심었던 전나무가 쓰러진 후, 우복 종가에서는 전나무를 다시 계정 옛터에 심었을까 궁금해진다. 전나무가 없다면 지금이라도 한 그루 심어두면 운치 있을 듯하다.******
<끝>
* 졸저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의 ‘정원수로 사랑받으며 향으로 쓰인 향나무 – 회檜’에서는 주로 회檜가 향나무로 쓰인 용례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아언각비> 인용문은 p.284 참조.
** 故宮之長松老檜 蒼肰森列 如對几案 - 披吟亭記
*** 溪亭之前有老檜 相傳是先祖手植 歲久衰朽 枝葉枯死 今夏忽自仆 眞杜子所謂草堂自此無顔色者矣 余竊傷之 以七言古詩若干句賦其事 – 입재집
**** 향나무의 수명은 훨씬 더 길다. 내가 본 향나무만 해도, 안동 와룡 경류정의 뚝향나무는 추정 수령이 600여년이고, 창덕궁 향나무도 수령 750여년이라고 한다.
***** 중국에서 남목楠木(혹은 남수楠樹)은 궁궐을 지을 때 재목으로 사용되는 중요한 나무이다. <중국식물지>에는 학명이 Phoebe zhennan으로, <중약대사전>에는 Phoebe nanmu (Oliv.) Gamble (Machilus nanmu의 이명)로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녹나무과에 속하는 넓은 잎 상록수들이며, 우리나라에는 자생하지 않는다.
******(25.7.16) "종택 북측에 위치한 대산루와 계정으로 가는 길 양측으로 가시칠엽수, 전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대산루와 계정 앞으로 단풍나무, 은행나무, 백목련, 팽나무, 산수유 등이 식재되어 있다. 계정 주변에 자리한수목들은 대부분 1979년 문화재 정비과정에서 식재되었고, 은행나무의 경우 약 50년 전 소유주가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한다. 대산루 뒤편으로는 단풍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곳곳에 복사나무, 이팝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등이 자리하고 대산루 내부에는 불두화, 모란, 회양목 등이 식재되어 있다." - <한국의 민가정원 - 경상도 일대의 민가를 중심으로> (국립수목원 발간), p.60.
+표지 : 전나무 구과 (2021.9.11 소백산)
^ 참고로 <중국식물지>에서 전나무(Abies holophylla Maxim.)의 중국명은 삼송杉松이다. 俗名으로 요동냉삼遼東冷杉, 삼목杉木 등을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