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생태원 방문 기념 식물 이야기
문일평의 『화하만필』에 접시꽃을 소개한 글이 있다. 제목은 ‘촉규화蜀葵花(어승어)’이다. “촉규화蜀葵花는 경기京畿말로 어승어, 西道말로 둑두화, 南道말로 접시꽃이라고 한다.”로 시작하여, 최치원의 촉규화 시를 소개하면서 마무리하고 있다. 이 글을 보면 ‘어승어’가 접시꽃의 별명임을 알 수 있다. 원예가 최영전의 『백화보』에서도 ‘어승어’를 접시꽃의 별칭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접시꽃이라 하는 것은 꽃모양이 접시처럼 납작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며, 곳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르다. 서울 지방에서는 어승어, 평안도에서는 둑두화, 삼남지방에서는 접시꽃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이 꽃을 촉규화(蜀葵花)라 하며 잎이 아욱을 닮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라고 썼다.
‘어승화’도 접시꽃의 별칭이다. 한글학회 지은 『큰사전』에서 “어승화(御-花) = 접시꽃”이라고 했다. 1966년에 《여원女苑》이라는 잡지 4월호 부록으로 출간된 『원예와 꽃꽃이』에서도 접시꽃을 ‘어승화 (Althaea rosea)’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승어’ 혹은 ‘어승화’는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1960년대 까지도 접시꽃의 서울, 경기지방 이름으로 쓰였던 것이다.
올 7월 무더위는 유난히 심했다. 가히 기후 위기가 현실로 닥쳐오는 전조인 냥 연일 낮 최고 기온이 36도, 37도를 오르내린다. 첫째 휴가 일정에 맞춘 올 여름 휴가는 하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하순이라, 에어컨이 가동되는 실내로 다니기로 했다. 휴가 첫날 오전에 출발하여 기온이 최고로 올라간 한 낮에 첫 목적지인 서천의 국립생태원에 도착했다. 국립생태원에는 에코리움이라는 실내 생태 전시관이 크게 조성되어 있어서 더위를 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정한 곳이었다. 그러나 생태원은 상상보다 넓은 곳이었고, 에코리움은 정문의 관람객 주차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참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무더위에 시달린 후에 에코리움에 도착했다. 다행히 실내는 시원했다. 마침 1층에서는 <명화로 만나는 생태>라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어서 더위를 피하면서 여유롭게 관람했다.
이 기획전시회에서 소개한 명화 중의 하나가, 개구리의 생태를 아이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전시한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 초충도의 ‘어승이와 개구리’였다. ‘개구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라는 제목의 명화 설명 판넬에 “그림을 봐. 머리를 쳐든 개구리가, 나비가 가까이 오기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어. 개구리가 사냥을 하려는 거야! 개구리는 긴 혀 덕분에 가만히 앉아서 사냥을 해. 먹잇감을 발견하면 혀가 화살처럼 튀어나가. 혀로 잡은 먹이를 입으로 가져오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아.”라고 설명하면서 신사임당의 초충도 한 폭을 전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아! 요즈음은 아이들 교육을 위한 재미있는 곳이 참 많구나, 하면서 그림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명불허전인 신사임당 초충도에는, 도라지와 닥풀 꽃에 나비가 날아들고 고추 잠자리 한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다. 메뚜기가 땅을 기어가고, 그 옆에 개구리 한 마리는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 과연 개구리의 사냥 속성과 명화의 기막힌 콜라보였다. 그런데 설명 판넬의 딱 한 곳이 마음에 걸렸다. 그림 속의 닥풀을 ‘어승이’라고 한 부분이다.
‘어승이’는 국어사전에도 고어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이 초충도 이름에서만 사용되는 듯하다. ‘어승이’는 ‘어승어’ 혹은 ‘어승화’의 와전일 가능성이 크므로 접시꽃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림속의 주황색 꽃은 잎 모양과 꽃 봉우리 모양으로 보아, 접시꽃이 아니라 닥풀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손가락 모양으로 깊게 갈라진 잎이 닥풀의 특징이다. 닥풀(Hibiscus Manihot) 잎은 잎자루가 길고 호생하며 5~9갈래로 깊게 갈라진다. 8~9월에 연한 황색 꽃이 핀다. 반면 접시꽃(Althaea rosea) 잎은 잎자루가 길고 호생하는 것은 닥풀과 같지만, 잎 가장자리가 5~7개로 얕게 갈라진다. 꽃도 닥풀보다 이른 6~8월에 핀다. 그림 속의 잎은 깊게 갈라진 것으로 보아 ‘어승어’가 아니라 ‘닥풀’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이 초충도의 제목을 ‘어승이와 개구리’라고 했을까? 만약 ‘어승이’가 닥풀을 뜻하기도 한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면, 이 그림 제목은 ‘닥풀과 개구리’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다행히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다룬 글을 검색해보니 대부분 ‘추규와 개구리’, ‘황촉규와 도라지’, 또는 ‘닥풀과 잠자리’ 등으로 그림 제목을 달고 있다. ‘추규秋葵’나 ‘황촉규黃蜀葵’는 모두 닥풀의 한자명이므로 모두 뜻이 통한다.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신사임당 초충도 병풍 (傳申師任堂筆草蟲圖屛風)’이라는 명칭으로 수장되어 있다. 초충도에 나오는 동식물을 잘 판별한 후, 각 그림마다 공식 명칭이 정확히 부여되면 좋겠다.
휴가 둘째 날은 한지韓紙의 도시 전주를 방문하여, 전주천년한지관과 전주한지박물관을 관람했다. 잘 알려진 대로 닥풀 뿌리는 점액질이 많아서 한지를 만들 때 접착제로 쓰이는 중요한 재료이다. 마침 전주한지박물관 입구에는 닥풀 여러 떨기가 심어져 있었고 벌써 꽃도 피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닥풀을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햇볕이 내리쬐는 한 낮이라 꽃은 오므라들어 있었지만, 초충도 그림처럼 잎은 여러 갈래로 깊게 갈라져 있었다. <끝>
*국립생태원 관계자가 이 글을 보시면, 신사임당 초충도 제목을 ‘어승이와 개구리’에서 ‘닥풀과 개구리’로 바꾸는 것을 검토해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