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잎갈퀴나물, 밀나물
내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과 봉화 접경지대의 산촌 마을이다. 어머니가 봄철마다 해 오시던 산나물 중에 ‘싸리대’라고 부르던 것이 있었다. 싹이 터서 줄기가 치밀어 오를 때 꺾어 오셨는데, 내 기억으로 고사리 줄기보다 길었다. 식물 이름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시골에서 사투리로 부르던 식물의 표준말 이름도 몇 가지는 알게 되었다. ‘산추뿌리’라고 부르던 것이 ‘삽주’, ‘가동나무’는 ‘참죽나무’, ‘배차국화’는 ‘과꽃’, ‘바뿌재나물’은 ‘뽀리뱅이’ 등이다. 그런데 ‘싸리대’로 부르던 나물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최근에 입수한 서울 대동문화사 간행 1956년판 『최신가정백과보감』에 『활명비방活命秘方』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목숨을 살리는 비방’이라니, 흥미를 가지고 펼쳐보았다. 과연 구황방(救荒方), 장수방(長壽方), 보양방(補養方), 수련방(修煉方) 등 전쟁 후의 궁핍했던 시대에 목숨을 살릴 묘방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말미에는 학명(scientific name)이 표기된 식용야초(食用野草) 목록도 있었다. 당시 가정생활에 필요한 잡다한 지식을 모아놓은 책에, 과학적 정확성을 위한 학명을 표기했다는 것이 대단히 흥미로웠다. 학명에 대응하는 식물명은 『조선식물향명집』(1937)이나 『한국식물도감』(1956)과는 달리 표기된 것이 많았다. 총 109종의 식용야초 중 네번째로 소개된 것이 ‘싸리나물’이었다.*
四. 싸리나물, 荳科, Vicia niponica, Matsum.
대는 四角柱狀이며, 複葉에는 五對 또는 六對의 小葉이 있으며, 잎대 밑에는 두개의 큰 托葉이 있다.
이 ‘싸리나물’을 보자마자 어릴 때 보았던 산나물 ‘싸리대’가 떠올랐다. 혹시 이 ‘싸리나물’이 ‘싸리대’가 아닐 까 하여, 『조선식물향명집』과 『한국식물도감』을 찾아보았다. Vicia nipponica는 ‘네잎갈키’로 등재되어 있었다. 현재 추천명은 ‘네잎갈퀴나물’이다. 6~8월에 꽃이 피는 식물이라, 지난 6월 말 계방산에 오를 때에도 꽃이 핀 개체를 여럿 만났다. 어렸을 때 줄기를 먹었던 ‘싸리대’로 보이진 않았다. 이번 기회에 ‘싸리대’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어서 AI에게 경북 안동지방에서 ‘싸리대’로 불리는 산나물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조록싸리’라는 대답했다. 조록싸리도 내가 기억하는 ‘싸리대’는 아니다.
국립수목원에서 발간한 『한국의 민속식물 – 전통지식과 이용』(2017)을 찾아보니 ‘싸리대’가 노랑갈퀴와 밀나물의 지방명으로 나온다.** 이중에 진짜 ‘싸리대’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해당 부분을 살펴보았다. 노랑갈퀴(Vicia chosenensis)의 지방명 ‘싸리대’는 강원도 태백, 정선, 홍천 지역에서 부르는 이름이었다. 안동이나 봉화 지방의 지방명은 아니었다. 강원도에서 어린잎을 먹는다고 한다. 네잎갈퀴나물과 같은 속의 식물인 노랑갈퀴도 내 기억 속의 ‘싸리대’는 아니었다. 밀나물(Smilax riparia var. ussuriensis)은 봉화군, 영덕군, 포항시 등에서 ‘싸리대’로 부른다고 기재되어 있어서, 봉화 접경의 산골마을인 고향의 ‘싸리대’일 가능성이 있다. “줄기와 잎을 생채, 장아찌로 먹거나 삶아서 나물로 무쳐 먹는다”고 하니, 이 밀나물이 바로 내 기억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산나물 ‘싸리대’임이 확실해 보였다.
그런데, 밀나물이 ‘싸리대’임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지난 목요일 (7월 17일) 어머니 댁을 방문했을 때 이것 저것 여쭤보았다. 우선 산나물 이름에 ‘싸리대’가 있는지 여쭤보니, 있다고 하신다. 그러면 시골의 산나물 이름을 불러달라고 하니, 이제 다 잊어버렸다고 하시면서 갬추, 나물취, 미역취, 뚜깔이, 잔대싹, 산추뿌리싹, 더덕 싹, 고춧대까지 말씀하시고 기억이 더 나지 않으신듯 말씀을 멈추신다.*** 이 중 ‘고춧대’는 으아리(Clematis terniflora var. mandshurica)로 추정한다. 『한국의 민속식물』에 따르면 으아리의 안동, 영주 지방 방언이 ‘꼬칫대’이고, “잎과 줄기를 삶아서 나물로 무쳐 먹는다.”고 전통 지식을 채록했다.
어머니에게 ‘밀나물’ 꽃 사진을 찾아 보여드리니, 새싹이 치밀어 오르는 모습만 봤지 꽃은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언젠가 밀나물 싹이 치밀어 오르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드려면서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싸리대’는 밀나물이 확실한 듯하다. 동속 식물 선밀나물(Smilax nipponica)도 『한국의 민속식물』에서 경상북도에서 “줄기와 잎을 나물로 먹는다. 생으로 먹고 기름에 볶거나 튀김으로 먹는다”고 하니, 아마도 고향 마을에서는 밀나물과 선밀나물을 모두 ‘싸리대’로 부르며 산나물로 먹었을 것이다. 밀나물은 『활명비방』의 ‘식용야초’에도 ‘우미채’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오월경에 한자 가량 새순이 비늘 같은 잎을 가지고 돋아 올라온다. 두릅대용품과 같은 나물이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활명비방』은 단행본으로도 대동문화사에서 1952년에 출판되었다. 책을 편찬한 사람은 이용철李容轍이나 인물 정보는 미상이다. 저자는 “전쟁과 기근으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도탄에 빠져있는 우리 겨레가 만일 이 책을 읽고 그 중의 한 사람이라도 도움을 입게 된다면 저자나 이 책을 세상에 공포한 사람의 기쁨이 이에 더할 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머리말 말미에 적었다. 휴전협정 후 70여년 동안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았고, 더 이상 우리나라는 기근을 걱정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이제 기근에 대비하여 『활명비방』을 읽고 식용 가능한 초근목피를 공부할 필요성이야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나에게 추억의 산나물 ‘싸리대’를 떠올리게 했을 뿐 아니라, 학명이 표기된 식용야초(食用野草) 목록은 식물명 연구에 귀중한 참고 문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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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문화사, 『최신 가정백과보감』, 1956. 부록 『활명비방活命秘方』 p.117.
**국립수목원, 『한국의 민속식물 – 전통지식과 이용』, 증보판, 2017
***갬추 = 개미취(Aster tataricus) (혹은 마타리(Patrinia scabiosaefolia)), 나물취 = 참취(Aster scaber), 뚜까리 = 뚝갈(Patrinia villosa), 잔대싹 = 잔대, 산추뿌리싹 = 삽주, 고추대 = 으아리(Clematis terniflora var. mandshurica)
**** ‘우미채’ (Smilax herbacen, L) 百合科. “오월경에 한자 가량 새순이 비늘 같은 잎을 가지고 돋아 올라온다. 두릅대용품과 같은 나물이다.” 『활명비방活命秘方』 p.134 – “Smilax herbacen, L”은 “Smilax herbacea L.”의 오기인 듯하다. Smilax herbacea는 우리나라에 자생하지 않는 식물이다. 우미채牛尾菜는 한약재명으로 밀나물(Smilax riparia A. DC)의 뿌리를 뜻한다 (중국본초도감 2422). 밀나물과 선밀나물 모두를 우미채로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추가 1.) 이 글을 본 여동생이 “엄마가 봄이면 싸리대 꺽어서 나물 해주셨는데 참 맛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어! 이제 맛볼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네~~“라고 해서, 너도 ‘싸리대’ 기억하고 있구나 했더니, ”마지막으로 먹어봤던게 수비니 태어나기 전 봄 입덧이 심해서 집에 갔을때 엄마가 꺽어다 나물로 해주셨는데 그것을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라고 대답했다. 우리집에서 ‘싸리대’는 임산부 입덧을 덜어준 소중한 산나물이었다.
추가 2 (2025.8.10) 어머니와 함께 안동국시로 저녁식사를 하고나서 싸리대와 고춧대 이야기를 다시 다누었다. 우선 내가 고춧대로 추정했던 으아리 새 순 사진을 보여드리면서 이게 고춧대 맞냐고 하니, 맞다고 하신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밀나물과 선밀나물 새순 사진을 찾아 여러장 보여드리니 '싸리대'라고 말씀하신다. 싸리대, 고추대는 고급 나물이어서 산골 우리집에서도 멀리, 새소재이 골짜기나 호깨바꿀 골짜기, 용두산 위로 올라가야 만날수 있었다고, 싸리대는 음지에 있었다고 하신다. 아울러 '갬취'가 마타리인지 개미취인지도 잎 모양을 보여드리면 여쭤보니, 잎이 보통 잎 모양에 톱니만 있는 개미취 류를 가리키신다. '미역추'가 '갬추'보다 더 반들받들하게 싹이 올라왔다고도 말씀하시고. 저녁 한 나절 어머니와 재미있게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