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芄蘭, 라마蘿藦
여름에 작고 앙증맞지만 진한 향기를 가진 꽃을 피우는 덩굴성 초본 식물로 박주가리가 있다. 이 박주가리(Metaplexis japonica [Thunb.] Makino)는 꽤 오래 전부터 나도 식별할 수 있었는데, 아이들이 어렸을 때 보던 어린이용 <교과서에 따른 식물학습도감>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도감에서 박주가리 꽃을 사진으로 본 후 성남의 집 근처 언덕에서 실제로 만났을 때의 기쁨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진한 꽃 향기에 반해, 꽃을 따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다.
이 박주가리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자라는 식물인데, 정원을 장식하는 화초로 가꾸어진 적이 없어서 우리나라 시인들이 즐겨 노래하지는 않았지만, <시경> 위풍衛風에 ‘환란芄蘭’이라는 제목의 시로 나온다.
芄蘭之支 박주가리 가지여
童子佩觿 어린 아이가 뿔송곳 찼네.
雖則佩觿 비록 뿔송곳까지 찼지만
能不我知 나를 알아주지 않네.
容兮遂兮 거들먹거리는 저 모습
垂帶悸兮 늘어진 띠만 덜렁거리네.
이 시에서 뿔송곳(뼈송곳. 觿)은 보통 상아나 뼈를 사용하여 짐승의 뿔 모양으로 만들어 매듭을 푸는데 쓰이는 도구인데, 박주가리 열매 깍지가 바로 뿔송곳 모양과 흡사하다. 이렇게 매듭을 푸는데 쓰이는 뿔송곳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가 있어서 성인들이 차는 것인데, 이 시의 동자가 거들먹거리면서 차고 있는 모습을 풍자하는 시라고 한다. 이 시의 환란에 대해서는, 주희朱熹의 시경 주석서인 <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환란芄蘭은 풀이니 일명 라마蘿摩이고 자르면 흰 즙이 있고 삼킬 수 있다”*라고 주석을 단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도 대체로 라마蘿摩로 이해해왔다. 나마자蘿藦子가 한약재의 하나이고 <동의보감탕액편>에도 나마자羅摩子가 ‘새박’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물명고>에는 나마蘿藦와 환란芄蘭을 모두 ‘새박쇼가리[새박죠가리]’로 설명하고 있다. 새박죠가리는 박주가리의 고어일 것이다. 이런 사정을 반영하여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은 박주가리(Metaplexis japonica Makino)의 한자명을 나마蘿藦로 기록했다.
가끔 이 환란芄蘭을 ‘일종의 난초’라고 주석을 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시인 두기杜機 최성대崔成大(1691~1762)가 변방의 성에서 읊은 시 ‘저녁 성에서 나그네의 바람 - 暮城旅望’을 읽어본다.
驅馬出暮城 말 타고 해질녘에 성을 나서니
平蕪思不極 거친 평원에서 생각은 그치지 않는구나.
故鄕在水西 고향은 물 서쪽에 있는데
春耕別原陸 봄갈이 할 때 들판을 떠나왔도다.
念玆行役遠 지금 생각하니 부역 길은 멀기만 한데
川流去未息 시냇물은 쉼 없이 흘러만 가네
明月照關樹 밝은 달은 변경의 나무를 비추고
蒼然津甸火 검푸른 성밖 나루에 횟불이 타오르네
昔時芄蘭草 옛적에 박주가리는
靑靑古城下 옛 성 아래에서 푸르렀다.
이 시에서 환란초芄蘭草, 즉 박주가리는 시경의 시에 비유하여 뿔송곳을 찬 젊은이를 상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은 시인만이 알리라. 이 시인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시詩 ‘환란芄蘭’을 해설하면서, “옛사람이 패물佩物을 차는 것은 쓰임새가 있는 물건일 뿐 아니라 항상 경계하는 바가 있었다. 옥玉을 차는 것은 덕徳을 닦고자 함이요, … 뿔송곳(觿)을 차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이해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다. 박주가리 열매에 참으로 깊은 뜻이 있는 셈이다. 박주가리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풀이다. 여름에는 꽃 향기를 즐기고, 겨울에 열매를 만나면 뿔송곳을 생각하면서 대자연의 이치에 경외심을 가져야 하리라.
<끝 2020.5.3>
*芄蘭草 一名蘿摩 蔓生 斷之有白汁可啖 – 詩經集傳
**古人佩用 不獨需用 毎存規警 佩玉所以比徳 … 其所佩觹警其究觧物理 – 星湖僿說
% 이가원 번역 시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