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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Jun 04. 2021

원대한 뜻이 소초小草가 된 사연과 류성룡의 원지정사

원지遠志, 소초小草, 애기풀(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1년 7/8월)

지난 5월 초순 식물애호가들과 함께 영월의 한 석회암지대의 식물상을 탐사하다가 귀한 약초를 만났다. 현장에서 이 약초가 애기풀인지 두메애기풀인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더 정확히 이름을 알기 위해 식물도감을 찬찬히 보았다. 우리나라 식물도감들과 <중국식물지>를 살펴보아도 전문가적 식견이 부족한 내가 정확히 동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잎 모양으로 보아 애기풀 같은데, 두메애기풀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애기풀과 두메애기풀은 원지(Polygala tenuifolia Willd.)와 함께 원지과遠志科 원지속遠志屬(Polygala L.)에 속하는 다년초이다. 어쨌든 “원대한 뜻”의 원지遠志라는 속 이름이 무언가 이 약초의 신비한 효능을 말해주는 듯하다.


애기풀 (추정), 2021.5.8 영월


원지는 <중국식물지>에도 원지遠志로 나오는데, 이명으로 소초小草 등이 기록되어 있다. 애기풀은 학명이 Polygala japonica Houttuyn인데, <중국식물지>에 과자금瓜子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과자금의 이명중 하나로 원지초遠志草가 기록되어 있어 원지와의 관계를 말해주며, 동북아 지역의 해발 800~2100미터에 자라고, 전초나 뿌리를 약으로 쓴다고 했다. 두메애기풀은 학명이 Polygala sibirica L.인데, <중국식물지>에 서백리아원지西伯利亞遠志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이명으로 묘엽원지卯葉遠志, 소엽원지小葉遠志, 지정地丁 등을 기록하고 있다. 중국전역과 한반도 북부지방 등 해발 1,100~3,300미터에 자라며, 원지의 대용 약재로 쓸 수 있다고 설명한다.


내가 영월 남면의 야산에서 만났던 원지속의 풀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중국식물지>를 살펴본 것인데, 두메애기풀이 애기풀보다 더 고산지대에 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내가 만난 것은 애기풀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 원지 류에 대해 살펴보다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과 관련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안동 하회에는 류성룡이 1573년에 건립한 원지정사遠志精舍가 있는데, 이 정사가 바로 원지속의 애기풀과 관련이 깊다. 원지정사기遠志精舍記에서 성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지정사, 2021.9.19 안동 하회마을
원지정사 현판 (좌)와 원지정사기 편액(우), 2021.9.19 안동 하회


“원지遠志는 본래 약 이름으로 일명 소초小草이다. 옛날 진晉 나라 환온桓溫이 사안謝安에게, ‘원지와 소초는 한 물건인데 어찌 두 이름을 쓰는가?’라고 물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들어앉아 있을 때는 원지요, 밖에 나오면 소초가 된다’고 하니, 사안이 부끄러워했다. 내가 산에 살 때에도 본디 ’원대한 뜻(遠志)’이 없었으니, 세상에 나가서 ‘작은 풀(小草)’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여기에 서로 비슷한 점이 있었다. 또한 의가醫家에서는 원지로써 심기를 다스려 혼미함을 없애고 번민을 줄인다. 내가 근래 심기에 병이 생겨서, 약을 먹을 때 마다 곧 원지를 사용했는데, 그 공을 감히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비슷한 점을 미루어 그 의미를 끌어온 것이고,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은 선비들도 늘 하는 말이므로, 이러한 몇 가지 뜻은 모두 재호齋號로 삼을 만하다. 그리고 정사 뒤 서산西山에는 마침 원지가 자라는데, 이따금 비가 올 때면 푸른 산이 더욱 아름다워 정사의 그윽한 정취를 돕는다. 곧 정사 이름을 원지라고 하니, 이러한 사실을 취한 것이다.”*


애기풀 (추정), 2021.5.8 영월 - 이 애기풀과 같은 속의 원지(Polygala tenuifolia Willd.)의 뿌리가 원지이고 잎이 소초이다.


이 원지遠志는 <동의보감>에, “성질은 따뜻하고 맛은 쓰며 독은 없다. 지혜를 더하며 귀와 눈을 총명하게 하고, 잊지 않고 뜻을 강하게 한다. 심기를 안정시켜 놀라거나 어지러움을 멈춰준다. 건망증을 치료하며 혼백을 편안하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에 빠지지 않게 한다. … 원지의 잎을 소초小草라고 부르는데 정기精氣를 돕는다”**고 했으며, ‘아기플불휘’라는 한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지정사기의 소재가 된 원지와 소초 이야기는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실려있는데, 이는 땅 속에 ‘들어앉아 있는’ 뿌리가 원지이고, 땅 ‘밖으로 나온’ 잎이 소초임을 말하면서, 선비가 은거하고 있을 때엔 ’원대한 뜻(遠志)’을 품고 있더니, 벼슬살이에 나와서는 보잘 것 없는 ‘작은 풀(小草)’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것이 된다.


‘원지정사기’에서 정사 뒤 서산에 원지가 자란다고 했는데, 1608년에 편찬된 <영가지>에는 이 산을 원지산遠志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풍산현도豊山懸圖를 보면 원지정사에서 볼 때 강 건너 겸암정謙巖亭 왼쪽 마을이 광덕리廣德里인데 이 마을 왼쪽에 위치한 산 이름이 원지산이다. 그리고 산천山川 조에 원지산遠志山이 “풍산현豊山懸 남쪽 이십리에 있다. 원지초遠志草가 많이 생산되어 이름이 붙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퇴계의 제자이자 동향 선배인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1526~1586)의 문집에서도 성룡과 원지를 읊은 시가 나온다. ‘객지 생활 달밤에 류수찬 이현而見이 오다 (客居月夜 柳修撰而見至)’라는 연작시 중 한 수이다. 이현而見은 성룡의 자字이다.


小草山中蘿補屋 소초小草 자라는 산중에는 담쟁이덩굴이 집을 덮고

蒼雲潭上竹爲帆 푸른 구름 연못에는 대나무가 돛이 되었네

一江煙雨平生計 강에 나리는 안개비가 평생 계책이니

蒻笠靑簑白布衫 삿갓 쓰고 푸른 도롱이에 흰 삼베 적삼이라네


이 시에는 “이현而見이 원지산遠志山에 살고 있었으므로 스스로 호를 하였고, 나 또한 백담栢潭으로 호를 하였다”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본초강목>에는 원지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이 풀을 복용하면 지혜를 더하고 뜻을 강하게 하므로 원지遠志라고 부르게 되었다”라고 설명했는데, 아마도 성룡은 젊었을 때 원지산이라는 지명과 원지의 효능을 고려하여 ‘원지遠志’를 자신의 호와 정사 이름으로 사용한 듯하다. 즉, 성룡은 30대의 젊은 시절에 원지遠志라는 이름을 쓰면서, 벼슬살이에 나가서도 절대로 ‘소초小草’는 되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을 것이다.


류성룡은 벼슬살이에서 최고 관직인 영의정까지 역임했다. 임진왜란이 닥쳤을 때 구국의 영웅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하여 나라를 지키게 하고, 명나라와 교섭을 이끌어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까지 전대미문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원지정사기에서 스스로 "세상에 나가서 ‘작은 풀(小草)’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했지만 류성룡은 결코 '작은 풀'이 되지는 않았다. 쫒겨나다시피 벼슬살이에서 물러난 후에도 나라를 위해 <징비록>을 지어 후세에 교훈을 남겼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국난을 극복한 지도자로서 영원히 우뚝할 것이다.


애기풀, 2016.5.1 서산


나는 ‘애기풀’이라는 이름 유래가 바로 원지의 다른 이름인 소초小草가 아닐까 추정해본다. 조선 후기에 발간된 <물명고>에 원지가 ‘아기풀’이라는 한글 이름으로 나오는데, “2종이 있다. 하나는 마황麻黃과 비슷한데 푸르고, 또 하나는 잎이 크고 홍화紅花이다.”****라고 했다. <본초강목>에도 원지가 “잎이 큰 것과 작은 것 2종이 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아기풀’로도 불린 원지는 2종 이상의 식물에 붙은 이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다가 근대 식물학자들이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을 발간할 떄, 원지속의 Polygala japonica Houttuyn 에 ‘영신초(아기풀)’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Polygala tenuifolia Willdenow에 ‘원지遠志’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부터 아기풀과 원지는 같은 속의 서로 다른 식물을 지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2013년 안동문화원에서 발간한 <내고장 편람, 풍천면>을 보면, 광덕리에 ‘안시미’ 혹은 ‘안심安心’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원지산遠志山의 북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 이 마을의 이름을 안심이라 부르는 것도 마을 뒤에 있는 원지산에서 귀한 약초로 알려져 있는 원지가 나므로 병에는 안심安心해도 좋다는 뜻으로 안심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지정사로 인해 원지가 자라는 산 이름을 원지산으로 부르고 되었고, 이 산 기슭의 마을 이름도 안심安心이 된 것으로 보인다.


원지,  김태영 사진 - 애기풀에 비해 잎이  바늘처럼 가늘고 길다.


나는 하회를 여러 번 방문했었지만, 원지정사에서 류성룡 선생이 정사를 지은 뜻을 헤아려본 적은 없다. 언젠가 다시 조용히 원지정사를 찾아 원지遠志와 소초小草에 담긴 뜻을 음미해보고 싶다. 그리고 강 건너 광덕리의 안시미 마을을 구경하면서 원지산에 올라 그곳에 자라고 있는 소초小草를 살펴보고 싶다. 일반적으로 애기풀은 잎이 2cm 가량의 긴 타원형인데 반해, 원지는 길이 1.5~3cm, 너비 1mm 이하의 바늘형 잎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애기풀은 한반도 전역에서 자라지만 원지는 주로 중부 이북에 자라며, 남한에서는 태백산맥을 따라 경북까지 아주 드믈게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영주와 안동 지방의 산에는 가끔 보인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원지산의 약초가 애기풀일 가능성도 있지만 원지(P. tenuifolia)일 가능성도 크다고 하겠다.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통권 193호, 2021년 7/8월, pp.74~79.>


* 遠志 本藥名 一名小草 昔晉人問謝安曰 遠志小草一物 而何爲二名 或曰 處爲遠志 出爲小草 安有愧色 余在山 固無遠志 出而爲小草則固也 是有相類者 又醫家以遠志 專治心氣 能撥昏蠲煩 余年來患心氣 每餌藥輒用遠志 其功不敢忘 因推類而引其義 治心之說 亦儒者常談 如此數義 皆可爲齋號 而舍後西山 適産遠志 每山雨時至 靑翠秀佳 助爲精舍幽趣 遂名精舍曰遠志 取其實也 - 遠志精舍記, 西厓集

** 遠志, 아기플불휘 性溫 味苦 無毒 益智慧 令耳目聰明不忘 强志 定心氣 止驚悖 療徤忘 安魂魄 令人不迷惑 … 遠志葉 名小草主益精 – 東醫寶鑑

*** 遠志山, 在豊山懸南二十里 遠志草多産故名焉 – 永嘉誌

**** 遠志, 有二種 一似麻黃而靑 一葉大而紅花, 아기풀 - 물명고

+표지사진, 애기풀 추정, 2021.5.8 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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