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梣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
산골 마을에서 자라면서 산에서 나무를 할 때 우리는 소나무나 잣나무, 낙엽송, 참나무, 싸리나무가 아니면 모두 잡목으로 취급했다. 꽃이 피는 참꽃(진달래)이나 개꽃(철쭉), 찔레꽃,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깨금나무(개암나무)나 머루(왕머루), 다래, 그리고 약용으로 사용되는 오배자나무(붉나무) 등은 조금 대접을 받아서 이름을 불러주었지만 나머지는 그저 이름없는 잡목이었다. 당연히 생강나무나 분꽃나무, 조팝나무, 국수나무, 신나무, 느릅나무, 시무나무 등은 나로서는 이름을 알 방법이 없었다. 신나무는 가지로 장난감 새총을 만들었으므로 아무렇게나 새총나무로 부르기도 했다. 소 코뚜레를 만들 때에는 물푸레나무를 쓴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어린 시절에는 물푸레나무가 정확히 어떤 나무인지는 몰랐다. 열두달숲 모임에 참가하면서 비로소 물푸레나무를 알게 되었는데, 이 나무는 산 곳곳에 자라고 있었다.
유홍준의 <완당평전>을 보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의 글씨로 ‘梣溪침계’라는 편액 한 편이 있다. “완당의 횡액 글씨 중 명품으로 손꼽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비문 글씨를 느끼게 하는 금석기가 강한데 완당은 윤정현을 위해 이 글씨를 쓰기로 마음먹은 지 30년 만에 비로소 서한 시대 예서체를 본받아 썼다고 한다.”라고 설명한 멋진 글씨이다. 침계梣溪 윤정현尹定鉉(1793~1874)은 추사의 제자로 먼 친척이라고 하며, 추사가 북청에 유배 중일 때 함경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나는 이 글씨를 보고 침계梣溪가 무슨 뜻일까 궁금해졌다. 우선 침梣이 어떤 나무인지 살펴보면서 추사의명작 침계梣溪의 배경을 알아본다.
옥편을 찾아보면 침梣은 ‘물푸레나무 침’으로 나온다. <중국식물지>에서 물푸레나무(Fraxinus rhynchophylla Hance)를 대엽침大葉梣(혹은 大葉白蠟樹)이라고 하고, <식물의 한자어원사전>에서도 梣을 Fraxinus chinensis (F. rhynchophylla Hance의 이명)라고 하여, 해석이 일치하고 있으므로 침梣은 물푸레나무 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글자로 물푸레나무를 가리킨 역사는 깊다. <훈몽자회>를 보면, “梣 므프레 잠, 약방문의 진피秦皮이다. (중국에서) 속칭 고리목苦裏木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자전석요>와 <한선문신옥편>, <한일선신옥편>에도, 침梣은 ‘무푸레, 청피목靑皮木’으로 일관되게 나온다. 아마 물푸레나무가 우리나라 전국의 산지에 자생하는 나무여서 혼동이 없었던 것 같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물푸레’는 나무 껍질을 벗겨서 물에 담그어 놓으면 파란 물이 우러난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리고 <훈몽자회>에서 ‘므프레’를 약방문의 진피秦皮라고 했는데, 이를 반영하듯 <동의보감 탕액편>에는 진피秦皮를 ‘무푸렛겁질’, <향약집성방>에서는 향명으로 ‘水靑木(물푸레나무껍질)’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일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본초강목>을 보면, “진피秦皮는 원래 침피梣皮로 썼는데, 그 나무가 작아도 우뚝하게 높이(岑高) 크므로, 이로 인하여 이름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잘못하여 심목樳木이라고 했고, 또 와전되어 진목秦木이 되었다. 어떤 이는 원래 진秦 지방에서 나므로 진秦이라고 이름했다고 말한다. … 껍질에 흰 점이 있는데 조잡하게 섞여있지는 않다. 껍질을 물에 담그면 물이 곧 푸른색이 된다.”**라고 해서, 약재 진피와 침梣이라는 나무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고, 나무의 특성도 밝히고 있다.
이제 물푸레나무가 분명한 침梣과 추사의 서예 작품에 등장하는 윤정현의 아호 침계梣溪의 관계를 추적해보기로 한다. 윤정현의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윤행임尹行恁(1762~1801)인데, 윤행임의 <석재고碩齋稿>에는 윤정현의 조부 윤염尹琰의 묘지인 청탄지靑灘誌가 있다. 시작 부분에 묘소 위치에 대한 다음 설명이 나온다. “아! 이곳은 선군자先君子의 묘소이다. 지명은 수청탄(水靑灘, 물푸레여울)이다. 수청(水靑, 물푸레)이라는 것은 심목樳木을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여러 문헌을 상고해보면 침피梣皮라고도 하고, 석단石檀, 번규樊槻, 진피秦皮라고도 한다. 용인龍仁 현縣의 동쪽 5리 법화산法華山 아래 오향午向의 언덕에 있다. 용인龍仁은 본래 구성현駒城縣이다. 현縣 좌左측에 공자를 모신 사당(夫子廟, 향교)이 있는데 사당에서 좌측이 법화산法華山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윤정현은 선대 묘소가 있는 수청탄水靑灘의 별명인 침계梣溪로 자신의 호를 지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고, 침梣은 물푸레나무를 가리켰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법화산法華山은 현재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에 있다. 청덕동은 수청동水靑洞과 덕수동德水洞을 합친 이름으로, 법화산 동쪽 물푸레고개에서 발원하는 탄천 상류 청덕천이 흐르는 동네이다. 용인문화원에서 발간한 <내고장 용인 지지총람地誌總覽>에는 청덕리의 부락 이름으로 ‘무푸레울’, 고개 이름으로 ‘무푸레고개’가 나오며, ‘무푸레울’은 “청덕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물푸레나무가 많았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물푸레나무가 많았던 청덕리의 ‘무푸레울’ 마을이 수청탄水靑灘, 즉 침계梣溪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윤행임尹行恁도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당하고 용인의 선산, ‘무푸레울’에 묻혔다. 윤정현은 부친이 묻힌 마을 이름을 호로 삼아 어린 시절 겪었던 신유박해의 슬픔을 평생 기억했을 것이다. 윤행임의 묘소는 청덕리에 있었으나 법무연수원을 건립하면서 이장되었다고 한다. 추사의 명작 “침계梣溪”의 배경 ‘무푸레울’은 역사의 흔적을 묻어버리고 지금은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아직도 ‘물푸레마을’이라는 이름은 불리고 있지만, 누가 침계梣溪를 기억할까? <고전종합DB>를 더 찾아보니 ‘침계梣溪의 옛 집을 회상하며 (懷梣溪舊居)’라는 윤정현의 시가 그의 문집에 남아있다.
吾廬尙在華南溪 우리집은 아직 법화산 남쪽 여울에 있는데
眞若過鴻印雪泥 진실로 기러기가 눈 진흙 밟고 지나간 듯 하여라.
惡艸誰能籬下去 울타리 아래 잡초는 누가 뽑아주나?
稚桑應與屋頭齊 어린 뽕나무는 응당 지붕과 나란해졌겠지
年年雨露餘生恨 해마다 우로의 은혜 입은 여생의 한을
處處川原舊夢迷 냇물과 들판 곳곳마다 옛 꿈이 희미하네
老境添丁如可賦 늙그막에 첨정添丁하고 시를 읊을 만 하니****
全家又向此中携 온 가족 이끌고 이곳으로 향하리.
나는 윤정현이 그리워했던 '무푸레울’ 마을에 물푸레나무가 있는지 궁금해서 간간히 눈발이 휘날리던 지난 주말 홀로 청덕동을 거닐고 법화산에 올랐다. 이 마을에 물푸레나무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아파트 단지로 개발된 마을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무푸레고개’와 법화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곁으로 그리 크지 않은 물푸레나무 몇 그루가 참나무 숲 사이에서 자랄 뿐이었다. 지금은 ‘무푸레울’ 마을의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데, 청덕초등학교 근처 청덕천 곁에 500년된 느티나무가 버팀쇠에 의지하여 힘겹게 숨쉬고 있었다. 아마 이 느티나무는 침계 윤정현의 어린 시절이나 어른이 된 후 선산을 찾는 모습을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무푸레울’에서 찾기 어려운 이 물푸레나무는 전국 곳곳에서 아름드리로 자라고 있다. 내 고향 마을에도 해마다 단오에 그네를 매었던, 당산나무 소나무 고목 곁에도 아름드리 물푸레나무 한 그루가 있다. 봄에 풍성하게 가지 끝에서 늘어지는 연두색 꽃차례도 아름답고, 단순한 흰 얼룩 무늬 수피도, 바싹 마른 열매 송이를 잔뜩 달고 있는 겨울 모습도 다 멋지다. 추사의 명작 글씨 침계梣溪에 얽힌 물푸레나무 이야기를 알고 나니, 이 나무가 더 멋있어 보인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소 코뚜레로 쓰던 물푸레나무는 쇠물푸레일지도 모른다. 선친께서 소 코뚜레를 만들기 위해 잘라 온 물푸레나무는 언제나 손가락 굵기의 어린 나무 줄기여서, 나는 물푸레나무가 자그마한 나무일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이다. 작년 봄에 고향 마을 산을 올라보니 코뚜레로 쓰기에 알맞은 낭창낭창한 쇠물푸레가 상당히 많이 보였다. 물푸레나무는 교목으로 크게 자라지만 쇠물푸레는 소관목 형태가 많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다신시문집>에 실려있는 정약용 선생의 연작시 귀전시초歸田詩草 중에서 물푸레나무*****를 노래한 부분을 감상한다.
松櫪濃姸處 소나무 참나무 곱게 우거진 곳
紆回梣木灣 휘돌아 흐르는 물푸레나무 물굽이
美如新櫛髮 새로 빗은 머리털 같이 아름다우니
愛是呂家山 이곳 여씨 집안 산은 사랑스럽네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 이유출판, 2023, pp.238~246 초고>
*梣 므프레 잠 方文云秦皮 俗呼苦裏木 - 훈몽자회
** 秦皮 本作梣皮 其木小而岑高故因以爲名 人訛爲樳木 又訛而爲秦木 或云本出秦地故得秦名也 … 皮有白點而不粗錯 取皮漬水便碧色 – 본초강목
*** 嗚呼 此先君子衣履之藏也 地名水靑灘 水靑者樳木之俗稱也 考諸圖經 或稱梣皮 或稱石檀 或稱樊槻 或稱秦皮 在龍仁之縣治之東五里 法華山之下 向午之原 龍仁本駒城縣 縣之左 有夫子廟 自廟而左曰法華 - 석재고碩齋稿
**** 첨정添丁은 아들을 뜻한다. <고문진보>에 실려있는 한유韓愈의 시 ‘기노동奇盧仝’에 “지난 해에 아들 낳아 첨정이라 이름지었는데 나라 위해 농사 짓는 장정에 충당케 하려는 뜻이었네 (去歲生兒名添丁 意令與國充耘耔)”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늙그막에 아들과 함께 시를 읊조리며 농사를 짓고 살고 싶다는 뜻으로 보인다.
***** 정약용丁若鏞의 <다산시문집>에도 ‘무파래고개巫巴來古介’가 나온다. <다산시문집>에는 정약용이 1823년에 강원도 춘천 지방으로 여행한 기록인 산행일기汕行日記가 있는데, 이 중에 문암서원文巖書院에서 묵은 후 침목령梣木嶺을 넘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21일, 일찍 출발했다. 구름이 끼어 비가 올 듯 했으나 늦게 맑아지기 시작했다. 서원에서 한 굽이를 돌아 침목령梣木嶺(무파래고개巫巴來古介)을 넘었다 (卄一日 早發 雲陰欲雨 晚始晴好 自書院小轉一曲 踰梣木嶺【巫巴來古介】 卽遇梣木遷 高臨江潭 如幾落閣 凜乎危也 特以禮曹判書新過 繕治極平 猶可以著跟也 行十里 過仁嵐驛).” 문암서원은 춘천시 신북읍 용산리에 있던 서원이고, 용산리에서 인람역仁嵐驛이 있던 인람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지금도 ‘수청령水靑嶺고개’라고 불리는 곳인데, 이곳을 정약용은 침목령梣木嶺이라고 적었던 것이다. 아마도 당시 ‘무푸레고개’라고 부르던 곳을 침목령梣木嶺으로 적었을 것이다. 또한 <목민심서> 형전刑典에서도 침목梣木으로 곤장을 만든다고 하면서, 그 껍질을 진피秦皮라고 하고 “방언으로 무파래無巴來”라는 주석을 달고 있다. 이로 보아 다산은 침梣을 물푸레나무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
+표지사진: 물푸레나무, 2019.6.23 청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