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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Oct 01. 2021

이른 봄에 잎이 일찍 나고 먼저 지는 귀룽나무&들쭉나무

앵액櫻額, 조리稠李/稠梨, 두체杜棣

이른 봄 산속에서 가장 빨리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는 나무가 생강나무라면, 가장 먼저 연두색 새 잎사귀를 펼치는 나무는 귀룽나무이다. 아직 대부분의 낙엽 활엽수들이 나목으로 봄맞이 준비를 할 때, 키큰 귀룽나무의 신록은 계곡 이곳 저곳을 봄빛으로 물들인다. 뿐만 아니라 가을이 되면 가장 빨리 잎을 떨군다. 여름이 한창인 8월 중순에 벌써 잎사귀 색을 바꾸기 시작하여 10월이면 낙엽이 거의 다 진다. 아직 온 숲이 푸르고 단풍이 지기 시작할 무렵, 귀룽나무는 잎을 다 떨궈내고 가늘고 긴 가지들을 늘어뜨린다.


귀룽나무 꽃, 2019.4.28 안동
귀룽나무 (좌) 신록, 2021.3.13 물향기수목원, (중) 단풍, 2020.8.8 창경궁, (우) 낙엽진 모습, 2020.10.17 남한산성


귀룽나무(Prunus padus L. / Padus avium Miller)는 지리산 이북의 산지 계곡가에 흔하게 자라는 나무이고, 봄에 피는 꽃도 풍성하게 이뻐서 선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을 법 한 나무이다. 그리고 이 ‘귀룽나무’라는 이름은 <조선식물향명집>에 채록된 이름이므로, 일제강점기 당시에 민간에서 이 이름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귀룽나무는 고전에서 한자로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귀룽나무 꽃, 2021.4.16 화야산

정태현의 1943년 <조선삼림식물도설>을 보면, 이 귀룽나무의 한명으로 구룡목九龍木과 조리稠梨가 기재되어 있다. <중국식물지>는 귀룽나무를 조리稠李라고 하는데, 아마도 조리稠梨와 조리稠李는 혼용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1942년 3월에 조선총독부임업시험장에서 발간한 <임업시험장보고 제33호 조선산야생식용식물>에는 귀룽나무의 한명으로 구룡목九龍木과 조리稠李가 기재되어 있는데, 정태현은 이 작업에도 참여한 바 있다. 그 후, 1947년간행  도봉섭, 심학진의 <조선식물도설-유독식물편>과, 1956년 이영노, 주상우 공저의 <한국식물도감>에는 귀룽나무의 한자명으로 구룡목九龍木만 기재되어 있다.


구룡목九龍木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박상진이 <궁궐의 우리나무>에서 북쪽 지방에서 구룡九龍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에서 많이 자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아직 나는 옛문헌에서 그 전거를 찾지는 못했다. 몇 해 전에 복사본을 입수한, 이종진李鐘震의 1873년 발문이 붙어있는 필사본 <녹효방錄效方>에서는 귀농목貴弄木이라고 표기한 약재가 나오는데, 이 귀농목의 한글 이름을 ‘귀룡나모’로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구룡목九龍木도 귀룽나무의 음차일 가능성도 있다. 하여간, <중약대사전>에는 한약재 조리자稠梨子가 다모조리多毛稠李(Prunus padus L. var. pubescens Reg.), 즉 귀룽나무 변종의 열매로 나오는데, 이 조리자稠梨子의 이명으로 앵액櫻額 및 앵액리櫻額梨도 기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귀룽나무는 중국 고전에서 한자로 조리稠李, 조리稠梨 및 앵액櫻額 등으로 표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귀룽나무 성숙한 열매, 2020.9.12 화악산 - 과연 검은색 야포도野葡萄, 즉 머루와 비슷한 모습이다. 강희제의 기가여편의 앵액은 이 귀룽나무일 것이다.


그런데,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저술,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의 북변잡의北邊雜議에 앵액櫻額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앵액櫻額은 지금 북로北路에서 ‘들쭉(杜乙粥)’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혹은 두체杜棣라고 한다. 본초本草를 상고해보아도 그 모양을 찾을 수 없다. 강희제康煕帝(1654~1722)의 <기가여편幾暇餘編>에서 말하기를 성경盛京, 오랄烏喇 등에서 모두 생산된다고 했다. 그 나무는 총생叢生이고, 과일 모양은 머루(野葡萄)와 같은데 조금 작다. 맛은 달고 떫으며, 성질은 따뜻하고 비장을 돕고 설사를 그치게 한다. 햇볕에 말려 가루로 만들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또한 <성경지盛京志>에 앵액櫻額은 일명 조리자稠李子이다. 토착민들이 보배로 여기고 더운 달에 면으로 만들어 물에 말아 먹는다. 설사를 멈출 수 있다.”*


성해응의 앞의 설명을 보면, 중국에서 귀룽나무를 가리키는 앵액櫻額을 우리나라에서는 들쭉나무로 이해한 정황이 보인다. 성해응의 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두을죽杜乙粥’은, 유희가 <물명고>에서도 “우리나라 북부 지방에 있는 이른바 ‘두을죽豆乙粥’이라는 것은 열매가 오미자五味子 같은데 핵核이 없다. 맛은 새콤달콤하다. 과일로도 충분한 고품이다”**이라고 설명한 나무와 같을 것이다. 이 '두울죽'을 현재 들쭉나무(Vaccinium uliginosum L.)로 부르는데, <물명고>의 설명과 같이, 현재에도 흑자색으로 익는 들쭉나무 열매는 식용한다.


‘두체杜棣’는 들쭉(杜乙粥)’의 이명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백두산변증설’에 “두체杜棣는 민간에서 둘죽㐙粥이라고 부른다”라고 한데서 알 수 있다. 이는 <아언각비>의 두중杜仲 조에도 보인다. “두중杜仲은 향목香木이다. 일명 사중思仲, 일명 목면木綿이다 [껍질 중에 솜 같은 은색 실이 있다.] [본초에 이르기를,] 옛적에 두중杜仲이 이것을 먹고 득도하여 두중杜仲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방언으로 두을죽杜乙粥이라고 말하는] 두체자杜棣子를 잘못 두중杜仲이라고 하고, 또 와전되어 두충杜沖이라고 한다. 약포藥舖의 거간꾼들이 모두 두충杜沖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두충 잎과 열매, 2019.6.9 양평

두중杜仲은 두충(Eucommia ulmoides Oliv.)을 가리키는데, 정약용은 이 두충을 들쭉나무 열매로 말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두충의 열매와 잎을 찢으면 속의 끈끈한 진액이 실처럼 보인다. 그리고 중국 본초학 문헌에는 ‘두체杜棣’라는 식물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두체杜棣는 들쭉나무를 가리킨 우리나라 한자명인 것이다. 또한 앵액櫻額도 이시진의 <본초강목>에는 실려있지 않으므로, 성해응은 ‘본초本草를 상고해보아도 그 모양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위에서 인용한 성해응과 정약용의 글을 보면, 백두산에서 많이 나는 들쭉나무 열매는 일찍이 식용으로 널리 알려진 것인데, 이것의 한자명에 대해 혼란이 있었고, 일부 학자들이 앵액櫻額이나 두중杜仲이 들쭉나무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중국식물지>에서는 들쭉나무를 ‘독사월귤篤斯越橘’이라고 하고 이명으로 흑두수黑豆樹 등이 기재되어 있다. <조선삼림식물도설>에서도 들쭉나무의 한자명으로 흑두목黑豆木을 기재하고 있다.


산앵도나무, 2018.9.8 태백산 - 들쭉나무와 같은 Vaccinium 속의 나무이다.


참고로 성해응은 ‘백두산기’에서 들쭉나무를 가리킬 때 앵액櫻額 대신 두체杜棣를 쓰고 있다. 예를 들자면, “연지봉臙脂峯, 뾰족한 형상으로 붉은 색이어서 이름이 붙었다. 두체杜棣(들쭉나무) 떨기가 봉우리를 덮고 있어서 붉은 것이지, 흙이나 돌 색깔은 아니다”**** 등이다. 실제로 들쭉나무는 높이 0.5~1m정도 자라는 낙엽관목으로 가을에는 붉게 단풍이 든다. 그리고, 들쭉나무는 만주를 포함한 중국 북부지방, 즉 성경盛京과 오랄烏喇 지역에 자생하는데, <한국의 나무>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제주(한라산) 및 강원(설악산) 이북의 높은 산지 바위지대”에 자란다고 한다. 나는 동속 식물인 산앵도나무는 몇 차례 보았지만, 아직 들쭉나무는 만나지 못했다. 고산지대에 드물게 있다고 하니, 쉽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식물애호가들과 함께 산길을 걷다가 들쭉나무 열매를 맛보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끝, 2021.8.30>

*櫻額者 今北路所稱杜乙粥也 或云杜棣 考之本草 未得其狀 康煕幾暇餘編云盛京烏喇等處皆產焉 其樹叢生 果形如野葡萄而稍小 味甘澁 性溫補脾止泄 曬乾之爲末 可以致遠 又盛京志 櫻額一名稠李子 土人珍之 暑月作麵調水服之 可止瀉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북변잡의北邊雜議, 記東方土産

**豆乙粥, 我東北道地有 所謂豆乙粥者 子如五味子而無核 味甘酸過之 充果高品 – 물명고

*** 杜仲者香木也 一名思仲一名木綿 [皮中有銀絲如綿] 昔杜仲服此得道 故名曰杜仲 [本草云] 東人誤以杜棣子爲杜仲 又訛爲杜沖 [方言曰杜乙粥] 藥舖牙郞皆呼杜沖 誤矣 – 아언각비

****臙脂峯, 形尖而色紅故名 杜棣之叢被之而紅 非土石之色也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북변잡의北邊雜議, 白頭山記

+표지사진 - 귀룽나무 성숙한 열매, 2018.9.8 태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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