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松, 萬年松, 향나무와 눈향나무(향토문화의사랑방안동 2023 1/2)
내 고향 근처 온혜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태어난 태실胎室이 있는 노송정老松亭 종택이 있다. 노송정老松亭은 퇴계의 조부 이계양李繼陽(1424〜1488)의 호로, 이계양이 온혜에 터전을 잡고 집을 지을 때 심었다는 노송나무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나는 몇 차례 퇴계 퇴실을 구경한 적이 있지만, 노송나무를 확인해볼 생각은 못했다. 노송老松, 글자 그대로 늙은 소나무를 뜻하는데, 이계양이 심을 당시에는 몇 십 년 되지 않았을 소나무를 노송으로 불렀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수백 년은 자란 나무라야 늙었다는 표현을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와룡면 주하리에 있는 진성이씨 대종가집에는 경류정慶流亭이 있는데, 이 경류정 앞에는 1982년에 ‘안동와룡면의뚝향나무’란 명칭으로 천연기념물 314호로 지정된, 수령이 600년에 가까운 향나무(Juniperus chinensis L. var. chinensis)가 자라고 있다. 이 뚝향나무라고 불리는 향나무는 퇴계선생의 증조부 이정李禎이 세종조에 영변의 약산성藥山城을 개축하는 일에 참여한 후 돌아올 때 약산에서 가져온 세 그루 중 하나를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뚝향나무를 당시에 노송으로 불렀고, 그 중 한 그루는 온혜의 노송정 종택에 심었다고 하므로, 노송정의 노송도 향나무를 지칭하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내가 진성이씨 종가집의 뚝향나무가 멋지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는 꽤 오래 되었지만, 지난 2020년 봄 성묘차 와룡을 다녀오던 길에 겨우 틈을 내어 경류정에 처음으로 들렀다. 과연 천연기념물 뚝향나무는 경류정 앞 마당에서 서리서리 울울창창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인 줄기하며, 엄청난 크기의 밑 둥, 폭이 10여 미터에 달하는 넓게 퍼진 가지들, 이 모두 감탄사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멋진 나무여서, 한참 동안 머물며 나무를 감상했다. 이렇게 멋진, 진성이씨의 역사가 서려있는 뜻 깊은 나무이니 선인들이 수 없이 시로 읊고 기문記文을 지었을 것이다.
바로 이 종가집의 유물을 전시했던 <진성이씨 기증유물특별전 도록>*을 보니, ‘노송운첩(老松韻帖)'과 김성설金星說, 이만인李晩寅(1834~1897)이 지은 ‘경류정노송기慶流亭老松記’ 도판이 실려 있다. 역시 이 뚝향나무를 선인들이 노송老松으로 부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반영하듯, 정태현은 <조선삼림식물도설>에서 Juniperus chinensis L.의 조선명으로 향나무와 노송나무를 기록했다. 그리고, 예천 출신 임학자 임경빈任慶彬(1922~?)의 <나무백과 2>에, “우리 동네 우물은 향나무로 반은 덮여 있었다. 가지가 땅을 기고 모양이 좋았다. 우리동네에선 그 나무를 대개 노송나무라고 불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최근까지도 안동 지방에서는 향나무를 노송나무라고 한 듯하다. 이제 잠시 이만인의 ‘경류정노송기’ 도판의 앞 부분을 읽어본다.
“우리 종가 경류정慶流亭 앞에는 만년송萬年松 한 그루가 있다. 가지와 줄기가 극히 구불구불 서리서리 얽혀서 엄연히 화개(華盖, 임금이나 고관이 사용하는 일산이나 수레의 덮개)를 우뚝 펼쳐놓은 것처럼 되었다. 높이는 겨우 몇 길도 안되지만 그 아래에는 백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참으로 기품奇品인 송松이다. 그러나, 그 깊은 뿌리와 많은 가지, 무성한 잎으로 짙게 그늘진 모습은, 송松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덕을 힘쓰고 업적이 넓은 군자의 솜씨를 거치지 않았다면 이처럼 오래도록 무성하게 우거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대로 전하기를 우리 14 세 할아버지 선산공善山公(이정李禎)께서 심으신 것이다. 뛰어난 우리 이씨 조상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초기에 항상 북쪽 오랑캐가 싹틀 근심이 있어서, 우리 세종대왕께서 약산성藥山城을 쌓도록 명하셨는데, 공께서 판관判官이 되어 감독을 잘하여 공적을 이루었다. 돌아오실 때에 약산藥山의 송松을 사랑하여 세 그루를 옮겨왔다. 한 그루는 곧 이 송松이고, 한 그루는 공의 셋째 아들 판서공判書公(이계양李繼陽)이 온혜에 터를 잡을 때 뜰에 심어서 지금 이 송松과 함께 무성하다. 또 한 그루는 외손 선산박씨善山朴氏 집에 돌아갔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일은 공의 5대손 송간공松澗公(이정회李庭檜, 1542~1612, 이정李禎의 6대손이다.) 세전유록世傳遺錄에 실려있다.”**
특기할 점은 이만인이 경류정 향나무를 만년송으로 표현한 점이다. 그런데 조선 전기의 원예서인 강희안姜希顔(1417~1464)의 <양화소록>은 노송과 만년송을 서로 다른 나무로 서술하고 있다. <양화소록>에서 노송老松은 삼침三針이나 오침五針 송松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수령이 오래지만 키가 작아 분재용으로 사용한 소나무 류로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노송은 향나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양화소록>의 사례처럼 그냥 늙은 소나무를 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양화소록>의 만년송이 이만인의 설명처럼 정말 향나무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양화소록>에는 “만년송萬年松은 모름지기 층층의 가지와 푸른 잎이 끈이나 실이 아래로 드리운 것 같고, 줄기는 구불구불하여 붉은 뱀이 수풀을 오르는 듯하며, 향기가 맑고 매운 것이 좋다. 잎이 희고 가시가 있으면 하품이다. 2, 3월에 좋은 것을 골라서 가지를 잘라 다른 그릇에 꽂고 나서 그늘에 두고 서서히 물을 주면 살아난다. 다시 난 새잎은 반드시 가시가 있어 거칠지만 여러 해가 지나면 끈이나 실처럼 된다. … 금강산과 묘향산 두 산의 꼭대기에 잘 자란다. 중이 채취하여 부처님 전 향을 만든다.”***
<물명고>에도 만년송萬年松이 있다. 무정류無情類 초草의 권백卷栢(한글명은 부쳐손) 항에 “석송石松, 송松 같으며 크기는 한두 자이고 자주색 꽃이다. 옥백玉栢. 석송石松의 작은 것이다. 옥수玉遂 동仝, 천년백千年栢, 화분에 심으면 오래도록 죽지 않는다. 만년송萬年松 동仝”****으로 소개되어 있다. 물명고에서 석송은 양치식물 석송과의 석송(Lycopodium clavatum L.)을 설명한 것으로 보이므로, 만년송도 석송류 양치식물을 지칭했을 것이다. <본초강목>에도 “옥백玉柏, 옥수玉遂이다. … 이것은 석송石松의 작은 것이다. 사람들이 캐서 화분에 심어 여러 해 길러도 죽지 않으므로 천년백千年栢, 만년송萬年松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물명고의 설명과 일치한다. <중약대사전>을 참조하면, 옥백玉柏은 우리가 만년석송(Lycopodium obscurum L.)이라고 부르는 석송과 양치식물이다. 그러므로, 중국 본초학 문헌이나 <물명고>의 천년백千年柏 혹은 만년송萬年松은 양치식물 만년석송이며, 나무가 분명한 <양화소록>의 만년송과는 다른 것이다.
<양화소록>을 이어,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도 십청원기十靑園記에서 “만년송萬年松. 바닷가에 많이 자란다. 등향藤香이라고 하며, 향기가 청량하다. 잎과 줄기에 가시가 없는 것이 좋다. 성질이 인가의 연기를 싫어한다. 중이 이것을 태워 부처를 모신다.”******라고 기록했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도 노곡초목지魯谷草木誌에서 “만년송萬年松도 소나무(松) 종류이다”라고 쓰고 <양화소록>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이유원李裕元(1814~1888)은 설악산에 올라 직접 만년송을 보고, “설악 최고봉에 만년송萬年松이 있다. 키는 몇 자에 불과하지만 가지와 줄기는 넓게 뻗어 있다. 바람과 이슬이 치는 곳에서 다만 땅을 덮으며 자랄 뿐이다. 그 잎을 따서 차를 만들면 매우 맑고 시원하다. 나는 이 산에 들어가서 차를 마시고 그 송松도 보았다.”*******라는 기록을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남겼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만년송은 향나무의 일종으로 우리나라 고산 지대에 낮게 자라는 눈향나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만인이 뚝향나무를 가리켜 만년송이라고 한 것은 어느정도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나무>는 눈향나무(Juniperus chinensis L. var. sargentii A. Henry)를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태백산 등 고산지대의 바위지대에 매우 드물게 자라는 희귀식물”로, “상록 관목이며 높이 50cm 정도로 자란다. 줄기는 땅 위를 기면서 자라지만, 절벽지에서는 아래로 처져서 자란다. 잎은 대부분 인편엽이며 어린가지에 간혹 침엽이 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이 설명은 <양화소록>과 <노곡초목지>, <임하필기>의 기록과 일맥상통한다.
이제 경류정 노송에 대한 기록을 세전유록에 남긴 이정회李庭檜와 동시대를 살았던 대표적 문인 최립崔岦(1539~1612)의 간이집簡易集에서 눈향나무와 향나무를 노래한 시를 차례로 감상한다. “속칭 만년송萬年松으로 실제는 향나무(香木) 종류이다”라는 설명이 달린 ‘만년향萬年香’과 ‘노송老松’이다.
만년향萬年香(눈향나무)
金剛仙種世難看 금강산의 신선 종자, 세상에서 보기 어려워라
移入銀臺傍玉欄 은대銀臺(승정원)로 옮겨와서 옥 난간 곁에 두었네
名著萬年知耐久 이름이 만년이라 오래 견딤을 알겠고
色同四節見凌寒 사철 같은 색깔이니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음을 보노라
盤根屈榦添人巧 서린 뿌리, 굽은 줄기에 사람의 기교 더하여
細葉低枝接地團 가는 잎, 늘어진 가지는 둥글게 땅에 닿았네
想得淸宵香更別 맑은 밤에 그 향기는 더욱 진하고
一庭皎月露溥溥 달빛 아래 뜨락에는 이슬이 내리겠지
노송老松(향나무)
曲榦樛枝儘自然 굽은 줄기 늘어진 가지는 모두 절로 그런데
奇姿應選泰山巓 진기한 자태는 태산 마루에 뽑힐 만 하여라
色貞堪賞後彫質 곧은 색깔로 늦게 시드는 바탕은 감상할 만하고
氣古難知初種年 예스러운 기품은 언제 심었는지 알기 어려워라
寒影疏分階上月 섬돌 위 달빛은 찬 그림자 드리우고
淸聲細帶石間泉 바위 사이 샘물은 맑은 소리 가늘어라
晴窓剩對成弘景 맑은 창가 마주하니 도홍경陶弘景이 된 듯하여
始覺銀臺有地仙 은대銀臺에 지선地仙 있음을 비로소 알겠노라
강희안의 <양화소록>은 주로 화분으로 가꾼 나무를 기록했다고 한다. 얼마 전 나는 창경궁 대온실에서 화분에 심어진 눈향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눈향나무를 보면서 강희안이 감상했을 만년송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강희안은 사철 푸르른 눈향나무를 가꾸면서 송백지후조松柏之後凋를 읊조렸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또 몇몇 수목원에서 야외에 심어진 눈향나무를 만난 적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산 꼭대기 바위 틈에서 강인하게 자라는 모습은 감상하지 못했다. 만년송으로도 불린 양치류 만년석송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언젠가는 눈향나무와 만년석송을 야생 상태에서 만나 감상의 기쁨을 누릴 날을 기다린다. 눈향나무 화분 하나를 곁에 두어도 운치가 있을 듯하다.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통권 202호, 2023년 1/2월, pp.74~82>
*진성이씨 기증유물특별전 도록, 옛 종가를 찾아서, 서울역사박물관, 2005. p.132
** 五宗慶流亭畔 有一株萬年松 柯幹紀屈盤結 儼然成巍張華盖 高僅數尋弱 下可容百許人 盖松之奇品 而其根深枝繁葉茂蔭厚之像 不獨松之能除 非嘗經德懋業廣君子人手分中 不應如此其蒼菀而悠久也 世傳 吾十四世祖考 善山公所植 時當仙李盤根之初 每有北虜蘖芽之患 我 世宗大王命築藥山城 公實爲判官 董治底績 其歸 愛藥山松 移三種以來 一卽此松 一爲公季子判書公 溫惠開基時庭實 今與此松並茂 其一歸外裔善山朴氏家 經龍蛇之亂而不傳云 事在公五代孫松澗公世傳遺錄 … 手植後四百餘年歲丁亥 ?威寒節 十四世孫晩寅盥手謹書 - 李晩寅, 慶流亭老松記
*** 萬年松 須層枝翠葉 如絛絲下垂 身幹回曲 如赤蛇騰林 香氣淸烈者乃佳 葉白有刺者乃下品 二三月擇佳者 折枝揷別器 置陰處 徐徐澆水則活 更敷新葉 必鬆鬆有刺 年久還如絛絲 … 好生金剛妙香兩山絶頂 衲子採之 作佛前香 – 양화소록
**** 石松 [似松高一二尺紫花] 玉栢 [石松之小者] 玉遂 [仝] 千年栢 [栽盆中久不死] 萬年松 [仝] – 물명고 무정류 草
***** 玉柏, 玉遂, … 此卽石松之小者也 人皆采置盆中 養數年不死 呼爲千年栢萬年松 - 본초강목
****** 萬年松 多生海上 謂之藤香 香氣淸冽 葉條無刺者佳 性惡人煙氣 山僧燒之 以事佛 - 許穆, 十靑園記. 특기할 점은 십청원기에서 허목은 겨울에도 푸른 열 가지 아름다운 식물로, 소나무(松), 측백나무(栢), 향나무(檜, 圓栢), 잣나무(五葉松, 海松), 대나무(竹), 자죽(紫竹), 비자나무(榧), 부처손(卷柏, Selaginella tamariscina), 맥문동(麥門冬)과 더불어 만년송을 들고 있으므로 만년송은 권백卷柏 이나 원백圓栢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식물향명집>은 Selaginella involvens Spring에 우리말 ‘부처손’을 부여하고 한자명으로 권백卷柏, 장생초長生草, 만년송萬年松을 기록하여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향명집 저자들은 <물명고>에서 기록한 권백卷柏과 옥백玉栢을 한 종류로 본 듯하다.
******* 雪嶽最高峯 有萬年松 長不過數尺 枝幹蔓延 風露所墜 只覆地而長而已 摘其葉作茶 最淸冽 余入是山 吸茶而又見其松也 – 林下筆記, 薜茘新志
+표지사진- 경류정 뚝향나무 (2020.4.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