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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Sep 27. 2023

<훈민정음해례>에 기록된 삽주와 추억의 ‘산추뿌리’

창출蒼朮과 백출白朮

한글이 창제된 후 1446년에 간행된 <훈민정음해례>에서는 “감을 시柿라고 한다.”를 포함하여 총 20종의 한글 식물명을 한자로 풀이하고 있다.* 이 20종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재배하거나 자생하는 식물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에는 “샵됴를 창출채蒼朮菜라고 한다.”라고 하여 ‘삽됴’도 기록되어 있다. 이 ‘삽됴’는 현재에는 ‘삽주’로 부르는 국화과 삽주속(Atractylodes) 식물이다. 식물 이름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나는 고향 마을에서 ‘산추뿌리’라고 불렀던 약초가 바로 이 삽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짧게 기록해 두었다. 날짜를 확인해보니 2011년 9월 17일이었다.


삽주 (좌) 겨울모습, 2010.11.19 검봉산, (우) 꽃, 2011.9.14 남양주


“어릴 적 산골에서 학교 다니던 시절, 가을걷이 끝나고 나면 어머니는 산에 가서 삽주 뿌리를 캐셨다. 수북하게 쌓여 있는 삽주 뿌리를 겨우내 껍질을 벗겨서 말린 다음 시장에 나가 파셨는데, 이 때 번 돈의 일부는 내 용돈으로 들어왔다. 그때는 삽주가 무엇인지, 창출, 백출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이 삽주 뿌리를 어머니는 '산추뿌리'라고 불렀기 때문에 근래까지도 몰랐다. 작년 말 초겨울의 어느 날, 산에서 찍어온 다 말라버린 '삽주' 사진을 식물도감에서 살펴보고 있을 때 어머니가 보시곤 '이거 산추뿌리인데'하신다. 겨우내 깎아 말리시던 그 산추뿌리가 삽주 뿌리, 즉 출朮이었던 것이다. 이 삽주는 약초이기도 하지만 봄에 산나물로 먹기로도 좋다고 하신다.”


산골동네에서 ‘삽주뿌리’ 발음이 ‘산추뿌리’로 변해서 사투리로 정착된 것일 터이다. 나는 산추뿌리가 바로 삽주임을 알고 나서 삽주를 더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넉넉하지 않았던 산골 우리집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었던 약초이고, 가끔씩 용돈이 생기게 한 식물이니 귀할 수밖에 없다. 산추뿌리는 생으로 파는 것보다 껍질을 벗겨 말려 파는 것이 돈이 더 된다고 말씀하신 것도 기억난다. 식물 탐사 여행에서도 삽주를 아주 가끔 만날 수 있었는데, 만날 때마다 내 눈길은 오래 머물렀다. 우리나라에는 삽주속 식물로 삽주(Atractylodes ovata – A. lancea의 이명)와 당삽주(Atractylodes koreana) 2종이 자생하고 있다. 용원삽주로도 불리는 당삽주는 삽주에 비해 엽병이 없는 것이 다르다고 하므로, 조선시대에 이 2종을 구분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훈민정음해례> 이후 우리 문헌에서 삽주는 주로 창출蒼朮, 백출白朮 등 2가지 약재의 한글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훈몽자회> 소채蔬菜 부에서는 “朮출(초두+术) 샵듀튤 (중국)민간에서 창출채蒼朮菜라고 한다. 간혹 출术로 쓴다.”라고 기록했다. <동의보감> 탕액 편에서는 “백출白朮 삽듓불휘”로 기록했고, 창출에 대해서는 한글훈을 달지 않았다. <산림경제>에서는 “창백출蒼白术, 삽쥬블희. 일명 산정山精이다. 백출 모양은 거칠고 빽빽하며, 창출 모양은 구슬을 꿴 것 같고 크고 작은 손가락 길이이다.”**라고 설명했다, <제중신편>에서도 백출을 ‘삽듓불희’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1937년에 간행된 <선한약물학>에서는 “蒼朮, Rhizoma Atractylis[羅]. 삽주뿌리. 고古엔 창백蒼白의 명名이 무無하다가 도홍경陶弘景이 시분始分한 것이라고 본초本草에 운운云云하엿는데 현하現下에는 눈근嫩根을 백출白朮이라하고 숙근宿根을 창출蒼朮이라 하나니라. 국과菊科에 속屬한 다년초多年草 오게라オケラ의 근根이니 본품本品은 산림원야山林原野에 자생自生하는 식물植物이니라.  … 백출白朮의 모식물母植物에 취就해서는 이설異說이 다多하나 그러나 국과菊科에 속屬한 오게라オケラ의 눈근嫩根이니라. 효능은 창출蒼朮과 동同하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게라(オケラ)는 삽주의 일본명이므로, 창출과 삽주의 오래 묵은 뿌리, 백출을 삽주의 어린 뿌리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문헌 기록으로 추정해보면, 대개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까지 창출과 백출을 모두 삽주의 뿌리라고 부르면서 같은 식물을 지칭해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삽주, 2022.10.15 제천 박달재


한편 중국에서는 창출과 백출을 다른 식물로 이해하고 있다. <중약대서전>에 따르면 창출은 Atractylodes lancea(중국명 창출蒼朮)의 뿌리줄기이고, 백출은 Atractylodes macrocephala Koidz.(중국명 백출白朮)의 뿌리줄기라고 하여 구별하고 있다. 이 중 창출이 우리나라의 삽주와 동일 식물이지만, 중국명 백출, Atractylodes macrocephala는 우리나라에 자생하지 않는다. <본초강목> 산초류山草類 출朮 항목에서도 이시진李時珍은 창출과 백출을 다음과 같이 다른 식물로 설명하고 있다. “창출蒼朮은 산계山薊이다. 산 속 곳곳에 있다. 싹의 크기는 2~3척尺이다. 잎은 줄기를 감싸며 나며, 줄기 끝 가까운 잎은 당리棠梨(Pyrus betulifolia) 잎 비슷하다. 아래쪽 잎은 3~5개로 갈라지며 모두 톱니에 작은 바늘이 있다. 뿌리는 늙은 생강 모양이고, 푸른 검은색으로 살은 희고 기름기가 있다. 백출白朮은 포계枹薊이다. 오월吳越 지방에 있다. 사람들이 많이 뿌리를 채취하여 모종으로 심는다. 일년이면 빽빽 해지며 연한 싹을 먹을 수 있다.  잎은 조금 큰 편이며 털이 있다. 뿌리는 손가락 크기 정도이며 북채 모양이다. 주먹만큼 큰 것도 있다.”*** 이와 같이 이시진은 두 식물의 특징을 설명하고 나서, 약효에 대해서는 “옛사람들은 출朮을 적백赤白으로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는데, 송나라 이래로 창출은 고신기열苦辛氣烈하고 백출은 고감기화苦甘氣和라는 말이 비롯되었다. 각자 용도에 맞게 쓰게 되었으며, 이것도 자못 이치가 있다.”****라고 한 점은 참고할 만하다.


<본초강목>이 전래된 후인 1800년대 어휘집인 유희의 <물명고>에서는 창출과 백출을 다른 식물로 설명했다. “출朮은 창출과 백출 2종이 있다. ‘삽주’이다. 산강山薑, 천계天薊, 마계馬薊. 흘력가吃力伽와 같은 것이다. 창출은 줄기가 거칠고 잎은 짙은 녹색이다. 단독으로 산마루에서 자라길 좋아한다. 채취해보면 뿌리가 구슬을 이은 것 같고 살은 황록색이 많다. 산계山薊, 산련山連과 같은 것이다. 백출은 줄기가 가늘고 잎은 약간 누렇고 산기슭에 모여 나기를 좋아한다. 채취해보면 뿌리가 생강 덩이 같고 살은 속이 전부 희다. 혹자는 백출을 특별히 ‘뎐자풀’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포계枹薊, 양楊과 같은 것이다.”***** 창출과 백출이 다른 식물이지만 우리말로는 모두 ‘삽주’로 부른다고 했다.


결론을 내려본다면, 중국에서 창출과 백출을 삽주속(Atractylodes)의 서로 다른 식물로 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창출蒼朮을 ‘삽주’로 이해했으며, 중국의 백출에 해당하는 식물이 자생하지 않으므로 약재 백출白朮도 삽주의 어린 뿌리를 사용해왔다고 할 수 있다. <물명고>에서 창출과 백출을 다른 식물로 설명했어도, 삽주라는 동일한 한글명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는 현실에서 이 2종을 구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조선 중기의 문인 이응희李應禧(1579~1651)가 약초류를 읊은 시 중 ‘창출과 백출 (二朮)’을 읽어본다.  


曾聞不死藥        일찍이 들으니, 불사약은

奇效在山薑        기이한 효험이 삽주에 있다네

九節珠連碩        아홉 마디는 구슬을 이어 놓은 듯하고

孤根玉絶剛        외로운 뿌리는 옥을 깎은 듯 굳세다.

寬中蒼不讓        속을 편하게 하는 덴 창출이 좋고

除濕白能當        습증濕症을 없애는 덴 백출을 써야지

老夫啗此久        이 늙은이는 오랫동안 이것을 먹었으니

人道壽如崗        사람들이 산등성이처럼 장수하리라 하네


<물명고>에서 출朮의 이명으로 산강山薑이 나오므로 이 시에서 산강山薑은 삽주이다. 그리고 시인이 장복한 창출과 백출은 모두 우리나라에 자라는 삽주의 뿌리일 것이다. 하지만 <중약대사전>에 의하면 산강은 대개 꽃양하(Alpinia japonica)를 가리키며, 생강나무(Lindera obtusiloba, 중국명 삼아오약三丫烏藥), 둥굴레속의 옥죽玉竹(Polygonatum macropodium Turcz.), 황정黃精(Polygonatum sibiricum Redoute, 갈고리층층둥굴레) 등의 이명으로도 쓰이므로 문맥을 잘 살펴야 한다.


삽주, 2022.10.8 영월


마지막으로 1910년 한일합방에 항거하여 자결한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의 시 한 편을 감상한다. 제목은 ‘시골 서당에서 화전을 부치다 시운에 화답하다 (和村塾煮花韻)’이다.


百花香過午風微  온갖 꽃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고

萬縷鵝黃帶雨飛  만 갈래 실버들은 비에 젖어 흔들리네.

村塾茅茨臨澗小  시골 서당 띠 집은 시냇가에 조그만데

主人魂夢出山稀  주인은 꿈속이라 나들이 드물구나.

鶯能欺世饒簧舌  꾀꼬리는 세상 속이려 교묘한 말 지껄이고

蝶解傷春褪粉衣  나비는 봄 시름에 날개 분이 바래어라.

追謝西隣勤送酒  술 보내준 서쪽 이웃에게 늦게나마 사례하며

雲根採朮犯昏歸  산속에서 삽주 캐어 어두워져 돌아오네.


병신丙申 년에 쓴 시라고 하니, 황현이 42세 때인 1896년에 지은 시이다. 이 시가 지어진 1896년이면 갑오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을미사변 후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해이고 서재필 등에 의하여 독립협회가 활동을 시작한 해이다. 교묘한 말로 세상을 속이는 자들도 있었을 터이지만, 아직 나라는 망하지 않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개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을 때였다. 그 희망과 더불어 황현은 시골 봄날의 정경을 담담하게 읊을 수 있었으리라. 아마도 시인은 불사약으로 일컬어진 삽주 뿌리를 캐면서 당시의 어두움을 밝히고 나라를 구하는 약이 되길 바랐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해석이야 삽주의 의미를 과대포장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삽주 뿌리는 옛날 가난했던 우리 집 생계를 보탰던 약초였다. 껍질이 벗겨진 채 작은 발 위에서 겨울 햇살을 맞으며 하얗게 꼬들꼬들 말라가던 어머니가 캐신 산추뿌리 정경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끝>


* 終聲解 – 뱃곶 梨花, 用字例 - 감 柿, 갈 蘆, 콩 大豆, 뒤 茅, 파 葱, 마 薯蕷, 드븨 瓠, 팟 小豆, 가래 楸, 피 稷, 버들 柳, 고욤 梬, 샵됴 蒼朮菜, 쟈감 蕎麥皮, 율믜 薏苡, 벼 稻, 닥 楮, 싣 楓, 잣 海松 – 훈민정음해례

**蒼白术 삽쥬블희 一名山精 白朮形麤促 蒼朮形如連珠 長如大小指 - 산림경제

***蒼朮 山薊也 處處山中有之 苗高二三尺 其葉抱莖而生 梢間葉似棠梨葉 其腳下葉有三五叉 皆有鋸齒小刺 根如老薑之狀 蒼黑色 肉白有油膏. 白朮 枹薊也 吳越有之 人多取根栽蒔 一年即稠 嫩苗可茹 葉稍大而有毛 根如指大 狀如鼓槌 亦有大如拳者 – 본초강목 朮

****昔人用朮不分赤白 自宋以來 始言蒼朮苦辛氣烈 白朮苦甘氣和 各自施用 亦頗有理 - 본초강목 朮

*****朮有蒼白二種 삽주. 山薑 天薊 馬薊 吃力伽 仝. 蒼朮 莖粗葉深綠喜獨生山巓採之根如連珠而肉多黃綠 山薊山連仝. 白朮 莖細葉微黃喜叢生山麓採之根如薑塊而肉全白瓤 或云白朮特名 뎐자풀 枹薊 楊仝 – 물명고

+표지사진 - 삽주 (2022.11.5 관악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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