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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길들이다

시간으로 빚어가는 일의 의미

by 루씨



‘일하는 것은 우리 내면을 단단하게 하고, 마음을 갈고 닦으며,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한 행위라는 것을.’ <왜 일하는가> 이나모리가즈오 지음, 김윤경 옮김



회사 생활을 하면서 내가 제일 피하고 싶었던 말 중 하나는 ‘모른다’라는 것이었다.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소한 내 일에 대해서만큼은 전문가이고 싶었다. 하지만 배우는 속도는 맡게 되는 일을 따라가지 못했으며 성과에 대한 부담으로 불안함도 커졌다. 적당히 넘어가고 책임도 분배하면서 스트레스를 관리했으면 좋았겠지만.



회사에서는 빠르고 효율적인 일 처리를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깊이 배우고 탐구하는 일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이해와 탐구의 시간이 사치가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과정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퇴사 후, 운 좋게도 함께 일했던 컨설팅 대표님을 만나 프리랜서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 맡았던 업무는 상품과 브랜드 분석을 바탕으로 컨설팅 자료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 상품은 왜 만들어야 하는가? 소비자들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하는가? 등의 질문을 바탕으로 시장 조사를 수행하며 자료를 만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 질문은 나에게 향했다. 나의 노동이 제공하고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컨설팅 일은 도전적이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고객사가 필요로 하는 자료를 조사하고, 논리를 구성해 전달하는 일은 긴장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보람차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일이 정말 내 일인가?’ 하는 의문이 남았다. 이 길을 계속 가고 싶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던 중, 주말에 병행하던 번역 일이 조금씩 마음에 닿기 시작했다. 영어 공부를 명목으로 주말마다 방송국에서 외신 번역을 하는 일이었는데, 하면 할수록 번역에 관해 관심이 커졌다. 뉴스를 읽어가며 배경을 이해하고,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 지루하지 않았다. 단어 하나하나 고민한 끝에 자연스러운 문장을 완성했을 때 그만한 쾌감이 없었다.



번역에 관한 관심은 신기하게도 새로운 기회로 이어졌다. 같은 방송국의 제작 PD님과 연이 닿아 두 편의 다큐멘터리 통역과 번역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자신이 없었지만, 이 문턱을 넘으면 한 단계 성장할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무사히 일을 마치기까지 통번역 연습에 시간을 쏟았고, 그럴수록 번역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졌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너에게 그 꽃이 그토록 소중한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시간을 내준 것 때문이야.’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 지음



번역 일을 하다 보니, 더 시간을 들여서 탐구하고 싶은 일이라고 느꼈다. 의미를 고민하고 문장을 다듬으며 완성해 가는 과정이, 꼭 내가 어렴풋이 원했던 일과 닮아 있었다.



어쩌면 나만의 일이란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다듬어가는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을 때, 비로소 가치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시간의 복리가 쌓이듯, 번역에 시간과 애정을 들여 탐구해 나가다 보면, 결국 나만의 일이 되어 있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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