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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획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어쩌다 프리랜서

by 루씨


치앙마이는 나에게 새로운 출발점 같은 곳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 프리랜서로 살아가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것은 그저 우연히 일어났을 뿐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또는 하지 않는 모든 일들은 우주에 있는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저 우연히, 예측할 수 없이 그리고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
플로리안 아이그너 지음, 서유리 옮김



선선한 날씨, 여유로운 사람들, 불편함 없는 온라인 환경 덕에 치앙마이는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일과 여행, 그리고 삶이 따뜻한 온도 속에 공존하는 치앙마이는 회사 생활에 지친 나의 몸과 마음을 위로할 장소로 제격인 듯했다. 게다가 모호하게 품고 있었던 프리랜서 삶에 대한 동경도 치앙마이행 비행기표를 끊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프리랜서의 길을 밟아갈 줄은 몰랐다.



비움이 있어야 채움이 있듯, 일은 잠시 내려두더라도 그만큼 좋은 에너지를 채울 수 있겠지. 치앙마이로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함께 일했던 컨설팅 회사 대표님의 연락을 받았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데 프리랜서로 일을 도와줄 수 있느냐는 제안이었다. 생각을 비우고 있던 터라 여행 이후의 계획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꽤 가벼운 마음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평소 같다면 새로운 계획으로 무장한 채 만반의 준비를 했을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미리 대비해야 마음이 편한 탓에,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기 전 나를 지켜줄 방패를 견고히 세우곤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의 계획은 외부의 힘 앞에서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애써도 주변 환경과 사람에 의해 나의 계획은 초라하게 무너져 갔다. 계획이 견고해질수록, 더 방어적으로 자신을 지킨다. 결국 세상 속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고립되는 것이다.



지금 세운 계획이 미래에 통한다는 법이 없다. 오히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만 안겨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계획을 크게 세우지 않아 보기로 했다. 견고히 쌓은 방패를 하나씩 내려두고 세상과 어우러지기로 했다.



삶을 계획한다는 것은 편협한 것이 아닐까. 다른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나로 치우쳐져 있는 편협함.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차오르는 절망과 분노를 겪고 나면 온 힘이 축 빠져 의욕을 잃는다. 세상은 두려우니 방어벽을 높이 세워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세상과 어울리겠다는 유연하고 능동적인 태도가 필요한 때이다. 다가오는 일들을 잘 해결해 가다 보면 미래의 나는 성취감과 자신감으로 도리어 더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무계획은 미래의 나에게 주는 선물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똑같은 크기의 가스 용기 두 개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하나는 가득 찼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비었다. 이제 용기 두 개를 호스로 연결하면 가득 차 있던 용기에 들어 있는 가스가 빈 용기 쪽으로 이동해서 두 용기 안에 들어 있는 입자의 양은 비슷해진다. (...)

원자들은 그냥 우연히 서로 충돌할 뿐이며 입자들이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려가는 근본적인 자연의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득 찬 용기에서 빈 용기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동이 발생한다.'

<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
플로리안 아이그너 지음, 서유리 옮김



물리학에서 원자들은 우연히 충돌할 뿐이지만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정확히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이를 우연의 힘이라고 부른다. 우연히 끊은 치앙마이행 티켓, 우연히 시작하게 된 프로젝트는 나를 어디로 이끄는 것일까. 프리랜서의 세계 안에서 나는 또다시 이리저리 부딪히겠지만, 어떻게든 내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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