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첫 번역 실험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첫 문장이다. 어려운 단어는 없지만, 첫 문장이 길어서 짚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아 실험 대상으로 선택했다. 우선 영어 문장을 해석하고 번역해 본 후, 출간된 번역본을 참고했다. 최종 번역문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해 본다.
Alice was beginning to get very tired of sitting by her sister on the bank, and of having nothing to do. Once or twice she had peeped into the book her sister was reading, but it had no pictures or conversations in it, “and what is the use of a book,” thought Alice “without pictures or conversations?”
한 문장이 길다. 짧게 주절을 나누어 내용을 파악해 보기로 한다.
1. Alice was beginning to get very tired. (왜?)
2. She had peeped into the book. (무슨 책?)
3. but it had no pictures or conversations in it.
4. What is the use of a book?
1-1 Get very tired of
‘get very tired of’는 지겹다, 지루하다, 심심하다, 따분하다 등 다양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럼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좋을까? 지겹다, 지루하다, 심심하다, 따분하다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지겹다: 넌더리가 날 정도로 지루하고 싫다.
지루하다: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같은 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따분하고 싫증이 나다.
심심하다: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따분하다: 재미가 없어 지루하고 답답하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앨리스가 할 일 없이 언니 곁에 앉아만 있는 모양이다. 이를 고려했을 때 ‘심심하다’가 앨리스의 상황을 잘 대변해 주는 듯하다.
1-2 Beginning to
‘심심했다’와 ‘심심해졌다’ 사이에서 고민했다. 하지만 ‘beginning to get very tired’라고 한 것을 보아, 점점 심심해지고 있는 상태인 듯하다. 따라서 ‘심심해졌다’가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추가 설명: '심심해졌다'
‘beginning’을 고려하면 ‘심심해지기 시작했다’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부분이 좀 헷갈려서 교정책을 찾아봤다.
마음이 변하는 건 나도 언제부터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변화에 해당하니 ‘시작하다’를 붙이면 어색하다.
1.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2. 마음이 변했다. (또는) 마음이 차츰차츰 변해 간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김정선 지음
참고한 책에 따르면, ‘심심하다’는 마음이 변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에 ‘시작하다’를 붙이면 어색하다고 한다. 그래서 ‘점점 심심해졌다’라고 자연스럽게 고쳤다.
1-3 On the bank
on the bank를 처음에 당연히 은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행에서 독서한다는 게 좀 이상하다. 사전을 찾아보니 bank에는 강둑, 강기슭, 제방, 언덕 등의 뜻이 있다. 그러 여기서 무슨 단어를 골라야 할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언니와 앨리스는 강과 언덕이 어우러진 들판에 앉아 있다. 만약 애니메이션을 참고하지 않았다면 익숙한 ‘언덕’으로 골랐을 테지만, 애니메이션을 참고해 ‘강기슭’으로 번역했다.
최종 번역문(1)
Alice was beginning to get very tired of sitting by her sister on the bank, and of having nothing to do.
‘앨리스는 강기슭에서 언니 곁에 앉아 할 일이 없어 점점 심심해졌다.’
2-1 it had no pictures or conversations in it.
it은 ‘그것은’이라고 번역해도 될까?
지시 대명사는 꼭 써야 할 때가 아니라면 쓰지 않는 게 좋다. ‘그, 이, 저’ 따위를 붙이는 순간 문장은 마치 화살표처럼 어딘가를 향해 몸을 틀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 이, 저’가 한 문단에 섞여 쓰이면 문장은 이리저리 헤매게 된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김정선 지음
교정 전문가의 조언을 새겨듣고 바로 고쳐 썼다. 문장에서 말하는 ‘그것’은 ‘언니가 읽고 있는 책’이다.
1) 지시 대명사를 빼 볼까? ‘어떤 그림이나 대화도 없었다.’
2) 책을 넣어볼까? ‘책에는 어떤 그림이나 대화도 없었다.’
두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 보니 후자가 조금 더 자연스럽다.
최종 번역문(2)
once or twice she had peeped into the book her sister was reading, but it had no pictures or conversations in it.
‘앨리스는 언니가 읽고 있는 책을 한두 번 슬쩍 들여다봤지만, 책에는 어떤 그림이나 대화도 없었다.’
영문 대화체를 보면 문장 중간에 said, thought 같은 표현을 삽입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한 문장으로 바꿔줘야 한다. “and what is the use of a book without pictures or conversations?” thought Alice. 이렇게 말이다.
추가 설명: 큰따옴표와 작은따옴표
그런데 큰따옴표가 쓰였다. 앨리스가 마음속으로 한 말이라면 작은따옴표를 쓰는 것 아닌가?
영어에서는 국가별로 따옴표가 쓰이는 방식이 다르다고 한다. 보통 영국과 호주 영어에서는 작은따옴표를 쓰고, 미국 영어에서는 큰따옴표를 쓴다고 한다. 생각을 인용할 때는 이탤릭체로 쓴다고 하는데, 위의 문장에서는 큰따옴표가 쓰였다. 크게 구분을 두진 않은 듯하다.
우리말에서는 큰따옴표와 작은따옴표는 역할이 구분되어 있다.
1) 큰따옴표: 대화, 인용, 사업명/전시명/학술대회명 등
2) 작은따옴표: 따온 말 가운데 다시 따온 말, 속마음, 드러냄표 등
앨리스가 속으로 생각한 이 문장은 '작은따옴표'를 써서 번역했다.
최종 번역문(3)
“and what is the use of a book,” thought Alice “without pictures or conversations?”
‘그림이나 대화도 없는 책이 무슨 소용이야?’ 앨리스는 생각했다.
한 문장을 쪼개고 번역문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려고 하니 꽤 벅차다. 한 권의 책이 완성되기까지 번역가들이 단어 선택의 순간 앞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을 거쳤을지 감히 상상도 안 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3가지 번역문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마친다.
(1) 앨리스는 강둑에서 언니 옆에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차츰 지겨워졌다. 언니가 읽는 책을 한두 번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책에는 그림도 없고 대화도 없었다. ‘그림도 대화도 없는 책이 대체 무슨 소용이람?’ 앨리스는 생각했다.
(2) 앨리스는 언덕에서 하는 일도 없이 언니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언니가 읽고 있는 책을 한두 번 슬쩍 들여다보았는데, 그건 그림도 대화도 전혀 없는 책이었다. “그림도 대화도 없는 책을 뭐 하러 보지?”
(3) 언니와 함께 언덕에 앉아 있던 앨리스는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한두 차례 언니가 읽고 있는 책을 힐끔 엿보기는 했지만 삽화 한 장, 대화 한 줄 보이지 않았다. ‘그림도 없고 대화도 없는 책을 뭐 하러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