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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문 Dec 10. 2021

어쩌면 나는 나를 읽고 싶었는지 모른다

도서관에서 '나'를 만나다

세 살 취미가 여든까지 간다.

정신없이 바쁘다가 갑자기 여유가 생긴다면 무엇을 할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한없이 많지만 선뜻 내키지 않는다. 이럴 때 우리를 이끌어주는 것은 무의식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그야말로 세 살짜리도 아는 클리셰(Cliché)이다. 특히 휴가처럼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을 때, 우리의 마음은 편안함을 찾는다. 마치 요가의 사바아사나와 같은  편안함.

계획 없이 다가온 시간은 편안함으로 수렴한다.


나의 발길은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결국 앉아있는 곳은 도서관이다. 도서관의 고요함, 그 고요함 속에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아마도 어릴 적 혼자 보냈던 시간 속에 책장 넘기는 소리는 나에게 특별한 힐링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나는 그 소리를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입으로도 흉내 낼 수 없었다. 지구 상에 오직 책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소리. 그 소리가 언어로 어떻게 표현되든 간에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소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책장 넘기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를 아시면 알려주세요 


나는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을 뒤지기 시작한다. 마치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뒤적뒤적 거리는 것처럼.

도서관에서 내 마음을 바라본다. 검색대에 서서 멍하니 검색창의 커서가 깜빡이는 모습을 바라본다. 

깜빡, 깜빡, 깜빡. 찰나의 순간이 길게만 느껴진다.

나는 재빨리 어떤 단어를 입력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일단 머릿속에 있는 단어들을 무의식적으로 끄집어 내본다.


"파이썬"

"토플"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아마 내 머릿속에는 아직도 일과 데이터 분석 생각이 끝없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좋게 얘기하면 열정, 안 좋게 말하면 일중독이다.

휴가 때도 파이썬이라니.. 최근에 아내가 한 말이 떠오른다. 

"너는 올해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 하는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아" 

말에 이상하게 미안하다.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비쳤을까? 재택근무로 집에서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었던 한 해였다.


또 토플은 어떠할까? 미국 대학원 진학에 대한 생각을 실천에 섣불리 옮기지 못하고 내내 질척이는 내 마음속을 보여주었다. 확 미국가 버려? 말아? 아쉽게도 도서관에 토플 수험서적은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결국 난 무라카미 하루키로 돌아왔다. 힘들 때 나를 다른 세계로 인도해주었던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일인칭 단수" 이제 그의 어떤 작품을 읽어 볼까? 벌써부터 나는 그의 작품, 그리고 작품 속에서 주인공들과의 대화에 벌써부터 설렌다.


도서관은 나의 머릿속이었고 가슴속이었다.
그리고 내 인생이었다.



20대에는 줄기차게 읽었던 책들은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와 "같은 자기 계발 서적에 파묻혀 살았다. 그리고 30대에는 "금융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비밀"과 같은 재테크 책을 줄기차게 읽어댔다. 그리고 요즘은 "프로그래밍"에 푹 빠져있다.


세상은 늘 변했다. 내가 상관하든 그렇지 않든 항상 변해갔고, 그 트렌드를 반영한 책이 나왔다.

그렇게 내 관심은 고스란히 내가 고르는 책에 투영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가 고른 책에 의해 학습되고 인생의 방향이 정해졌다. 마치 내가 데이터 분석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그러한 이유에서 나는 "누군가 손에 든 책의 제목이 그 사람을 말한다." 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 읽는 책이 아니지만, 그 책은 그의 일부분이 된다. 그리고 미래의 그를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내 삶에서 독서 목록은 나를 만들었던 부모님이고, 선생님이고, 친구 리스트이다.


그들이 지금 한 곳에 모여있었다.

도서관에서 나의 인생의 빈 공간을 채워주었던 그 책들을 만나는 시간은 나에게 엄청난 행복이 되었다. 순간 난 도서관과 하나가 되었다. 도서관은 나의 머릿속이었고 가슴속이었다. 그리고 내 인생이었다. 나는 내 인생의 한 부분 한 부분을 꺼내서 읽었다. 책 표지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책을 읽었던 그 순간 그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심지어 그때 맡은 커피 향기 나 바람결도 느껴졌다. 오히려 사진은 너무 구체적이어서 그 당시로 돌아가는데 방해를 한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나를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빨아낸다.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아내가 끓이고 있는 알탕의 매콤한 냄새가 났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라는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중학생의 나를 만났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그 집, 그리고 학창 시절 내 방의 책상 밑 슬램덩크 강백호 브로마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와 같이 한 열정의 순간들. 얼굴에 솜털이 난 20살의 순수한 나를 만난다. 


마음이 울적하고 힘든 시절에는 법륜스님의 "야단법석"을 비롯, 혜민스님의 "멈춰 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류시화의 "지구별 여행자"와 같은 책들이 함께 했다. 많이 힘들겠지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는 휴가가 되면 어릴 적 읽던 만화책과 과자를 즐기며 소확행을 누린다.


"소년탐정 김전일"과 홈런볼

아빠가 죽으면 제사는 됐고 소년탐정 김전일과 홈런볼을 같이 묻어주라.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사건을 해결한다는 김 군,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응 범인은 분명 이 도서관 안에 있어!


뜻하지 않은 어느 해 연말 

나는 도서관에서 나를 만났다. 


그리고 또 책장 넘기는 소리와 함께 다른 나를 빚어본다. "샤아각?"


도서관 검색창에 당신은 어떤 단어를 검색하시겠어요?
당신은 지금 어떤 책을 찾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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