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채용 확정형 연수
첫 회사를 탈출한 내가 향한 곳은 대전이었다. ‘채용 확정형 연수’라는, 지금 생각하면 꽤 매력적인 조건에 이끌려 대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첫 오리엔테이션에는 열 명 남짓이 모였다. 20대부터 30대까지, 출신지도 일본에서 수원까지 제각각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각자의 살 길을 찾아온 묘한 동질감 속에서 3개월 전우를 다지기 시작했다.
연수의 일본 IT 인프라 엔지니어 양성과정.
뼛속까지 문과생인 나는 ‘리눅스’, ‘윈도우 서버’, ‘네트워크’ 같은 단어 앞에서 매일 작아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잡념은 사라지고, 검은 화면 속 명령어들이 내 뇌리에 하나씩 새겨졌다. 하루 종일 검은 화면 앞에서 알 수 없는 명령어를 입력하는 나날이었다.
물론 고생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나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이기에 밤마다 동기들과 잔을 부딪히며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서버 다루는 실력 대신 뱃살이 조금 늘어났지만, 짧고 강렬했던 3개월의 기억은 여전히 재미있게 떠오른다.
3개월이었지만 그중 몇 강렬한 사건들이 있다.
1. 감금 사건
연수원 건물은 낡고 관리가 안 되어 문고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밖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나갈 수 없었기에, 암묵적으로 문을 열고 생활하였다.
그런데 주말 보충수업 날, 사정을 모르는 강사님이 문을 잠가버렸다.
모두가 소리를 질렀지만 문은 서서히 잠겨버렸고 우리는 그대로 건물 안에 갇히고 말았다.
일단 수업을 진행하였지만 누군가 화장실을 외쳤고 순식간에 패닉이 찾아왔다. 그때 가장 먹보 동기 동기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짜장면 시키면 안 돼요?
처음엔 다들 웃어넘겼지만, 그녀의 눈은 진심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논리가 완벽했다. 돈을 받아야 하는 배달 기사님이 직접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으니까. 강사님도 감탄한 끝에 실제로 짜장면을 주문했고, 잠긴 문은 기적처럼 열렸다.
다 같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고 기사님은 머쓱해하시며 손을 흔드셨다.
그날 우리는 배웠다.
위기의 순간을 가장 맛있게 해결해 주는 건, 배달 기사님이라는 것을.
2. 컨닝 사건 ― 파괴신의 등장
어느 날, 우리가 일본어 시험에서 단체로 컨닝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살기 위해 곁눈질을 하긴 했다. 하지만 계획적으로 작전을 짠 건 아니었다.
그냥 본능이었다.
그러던 중 관리자가 들이닥쳤다. 그리곤 우리의 답안지를 하나씩 들며 외쳤다.
답이 다 똑같아!
정답이 하나니까,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관리자분이 너무 분노에 차 있어서 모두가 조용해졌다.
모두 숨죽이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여자 동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마추어 복싱 출신인 그녀는 눈빛만 봐도 결심한 게 보였다.
화장실로 달려가 앞칸을 주먹으로 쳤고 놀랍게도 끝간 문이 열리며 굉음을 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우린 안 했어요! 진짜예요!”
교실 안은 잠시 얼어붙었다가, 이내 숨죽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관리자는 한참 멍하니 문을 바라보다 그냥 돌아갔고, 우리는 그녀에게 감탄과 웃음을 동시에 보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그녀를 ‘반의 파괴신 겸 수호신’으로 부르게 됐다. 시험 한 번으로 긴장감과 웃음을 동시에 만들어낸, 뜻밖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남은 연수 생활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다.
3. 오레(俺) 사건
우리 반에는 애니로 일본어를 배웠다는 동기가 있었다. 그는 늘 애니 주인공처럼 말했고, 1인칭은 언제나 ‘오레(俺)’였다.
참조로 일본은 스스로를 지칭하는 언어가 여러 개 있는데 오레의 경우, 스스로를 강하게 말한 뜻으로 주로 윗사람이나 친구 사이에 사용하는 단어이다.
운명의 날, 채용 예정 회사와 일본인 고객이 참관하는 수업이 열렸다. 숨죽인 분위기 속에서 그는 당당히 손을 들었다.
저… 오레가 질문이 있는데요!
공기가 쨍하고 갈라졌다. 일본인 고객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강사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질문 내용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남은 건 충격적인 ‘오레’뿐.
부사장님의 90도 사과로 상황은 수습됐고 우리도 나름 위로로 또레오레 치킨을 사 먹고 위로하였다. 하지만 그가 몇 달간 쌓아 올린 모든 이미지는 결국 단 한마디 ‘오레’와 함께 무너져버렸다.
연수와 관련된 모든 자격증을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탈락을 하게 되었다.
4. 내정 취소 사건
일본의 경우, 악덕 기업은 블랙 기업으로 표현하곤 한다.
내 첫 일본 회사는 블랙까지는 아니지만 짙은 회색의 회사였다.
연수 막판 회사는 갑자기 ‘조건부 내정’을 들고 나왔다. 매주 보고서를 제출해야 채용을 고려하겠다는 황당한 조건이었다.
동기 넷은 주저 없이 떠났다.
그리고 의외의 결과. 일본어를 제일 못하던 내가 최종 합격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면접관 한국인 선배가 그냥 잘 맞을 것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력이 아니라 관상이었단 말인가. 내 인생은 늘 이렇게 흘러갔다.
(뭐, 입사 후 지금까지 아주 잘 지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엉망진창 시스템 속, 남은 동기들은 반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내가 탈출할 때쯤, 생존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3개월의 연수, 반년의 대기. 그 사이 나는 편의점과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비를 버텼다. 그리고 2018년 9월 30일, 마침내 도쿄에 도착하게 되었다.
1라운드를 간신히 클리어한 게이머처럼, 최종 보스전은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