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무사히 도쿄에 도착했을까요?

인생은 실전이야, 도쿄는 신주쿠역부터

by chacha

입사일은 10월 1일.

하루 전인 9월 30일, 나는 가족과 연인에게 애틋한 작별을 고하고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본 한국의 하늘은 괜찮았는데, 일본의 하늘은 그럴 생각이 없었나 보다.

하필 태풍 '콩레이'가 일본을 직격하고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졌다.


비행기는 용케 떴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철도는 줄줄이 지연됐고, 30kg짜리 캐리어를 끌고 가는 세상 최대의 미궁, 신주쿠역에 던져졌다.


나는 평생을 출구 하나짜리 동네에서 산 지방러였다. 가끔 서울에 가서 복잡한 지하철역을 헤쳐 나온 경험으로 나름 출구 찾기에 자부심이 있었지만, 신주쿠역의 200개가 넘는 출구 앞에선 그저 겸손해질 뿐이었다.

일본어도 서툰데, 휴대폰마저 없었다.

"입사하면 다 알려줄 테니 공기계만 가져오세요."

그 순진했던 믿음의 대가는 혹독했다.


캐리어를 끌며 한 시간을 방황하자 서러움이 밀려왔다.

'이 짓을 매일 해야 한다고?!'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고, 한국에 두고 온 남자친구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나 이제 진짜 혼자구나.


결국 역 한복판에서 추접스럽게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때 젊은 역무원 한 분이 다가와 내 호텔 주소를 검색해 주었고, 나를 출구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친절이 아니었으면 내 도쿄 생활은 시작도 못 했을지 모른다.


역 근처에 도착했지만, 야속한 태풍은 모든 가게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편의점마저 텅 비어 있었다.

새벽부터 굶주린 배를 붙잡고 몇 바퀴를 돌았을까, 기적처럼 불 켜진 카레집 하나를 발견했다.

카운터 석 몇 개가 전부인 작은 가게.

그날 먹은 카레가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나는 지금도 인생 최고의 카레를 꼽으라 면 망설임 없이 그날의 카레를 이야기한다.


그렇게 나의 첫 출근 날이 밝았다.

함께 입사한 동기는 한국인 오빠 한 명.

우리는 3개월의 연수 기간 동안 끈끈한 전우애를 다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낯선 도쿄의 공기는 그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나의 숙소는 운 좋게도 1인실 여성 기숙사였다.

하지만 오빠가 배정받은 곳은 모르는 사람들과 방 세 개를 나눠 쓰는 셰어하우스였다.

그 환경이 익숙치 않았던 오빠는 누군가 자신을 스토킹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어느 날, 연수 중에 내가 메모장을 열어 말을 걸었다.

"오빠, 저녁에 뭐해요?"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에 답을 적었다.

"우리는 지금 네트워크 회선으로 감시당하고 있어."


진심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카메라가 무수히 있고, 저 멀리 앉은 광고 담당자가 우리를 감시하는 스파이라고 했다.

주말에도 노트북 회선을 타고 들어와 자신이 쓴 유서까지 확인했다고 했다.

180cm가 넘던 그는 연수 기간 동안 10kg 넘게 살이 빠져 50kg대가 되었다.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가 정말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결국 일은 터졌다.

오빠가 그 스파이에 다가가 떨면서 사죄를 했고, 당황한 그분이 상사에게 보고하며 모든 것이 알려졌다.

회사는 나를 통해 그의 부모님께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고, 결국 그를 설득해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얼마 후, 그가 옥상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두 다리가 부러지는 데 그쳤다고 했다.

나의 연락에 오빠는 이제 정신 차리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 후로 연락은 끊겼지만, 지금은 가족 곁에서 건강히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가 떠난 자리에, 대전에서 함께 연수받았던 다른 동생들이 입사했다.

무거웠던 공기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입사 후 연수는 기술 대신 명함 교환법, 비즈니스 일본어 같은 것들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아침마다 신문을 읽고 발표를 하고, 오후에는 IT 시험공부를 했다.

무엇보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라는 사실이 가장 큰 변화였다.


나의 오피스는 '신오차노미즈'라는, 애니메이션의 성지 아키하바라까지 걸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퇴근 후 우리는 근처 칸다역의 서서 마시는 선술집(타치노미야)에서 어른 흉내를 내며 맥주잔을 부딪쳤다. 도쿄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동생들은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주었고, 보고 싶은 남자친구도 한 달에 한 번씩 나를 보러 와주었다.


처음 나를 얼렸던 거대한 미로 같던 도시는, 이제 퇴근 후 동생들과 웃고 떠드는 일상적인 공간이 되어갔다. 나의 도쿄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평화롭던 연수 시절이 끝나고 진짜 현장으로 향할 발령의 날이 왔다.

keyword
이전 04화첫 회사를 탈출한 자, 대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