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첫 계절
운명의 첫 파견지는 가나가와현, 무사시코스기에 위치한 제조업 회사였다.
다행히 동기 셋과 같은 방에 배정받았고, 면접을 봤던 언니가 이미 이곳에서 1년 넘게 일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일터가 정해지자 인생 첫 이사를 준비해야 했다.
일본의 월세집은 집만 빌려주는 구조라 가전제품이 전혀 없다.
운이 좋아야 에어컨이나 가스레인지뿐이다.
대부분은 텅 빈 공간을 스스로 채워야 했다.
돈 한 푼 없이 도쿄에 온 내게 세탁기나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을 살 여유는 없었다.
다행히 회사는 우리의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가전제품이 갖춰진 '레오팔레스' 건물을 기숙사로 제공해 주었고, 6만 엔이 넘는 월세를 3만 5천 엔만 내게 했다. (총 6만 7천 엔)
도쿄의 집값을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었지만, 월급 명세서를 보면 감사함은 사라졌다.
물론, 도쿄 시내에서 6만 7천 엔짜리 레오팔레스는 있을 수 없었다.
가구가 딸린 집은 비쌌고, 넓지 않은 집도 8만 엔부터 시작했다.
현실과 타협해 찾아낸 곳이 가나가와현의 '나카노시마'라는 작은 동네였다.
6평짜리 완행열차가 다니고, 주민 대부분이 어르신인 조용한 시골 마을.
아무것도 없는 동네였지만, 역에 내리자마자 이곳이 마음에 들어 바로 계약했다.
지은 지 20년 된 3평짜리 집이 나의 첫 보금자리가 되었다.
부엌과 화장실이 분리되어 있고, 작은 TV, 옷장, 책상이 전부인 구조였다.
이 집의 하이라이트는 침실이었다. 바로 옷장 위였다.
저녁이 되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잠을 청하는, 나만의 아늑한 다락방이었다.
남은 가구는 중고로 채웠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나는 일본 거주 한인들의 성지와 같은 '동유모'라는 커뮤니티에서 구원의 손길을 찾았다.
마침 귀국을 앞둔 분이 히터, 가습기는 물론, 밥솥에 옷걸이까지 모든 살림을 넘겨주는 글을 올렸고, 나는 달려가 감사 인사를 전하며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
새것이라곤 매트리스와 이불뿐이었지만, 드디어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혼자 살기에 딱 좋은 크기였지만, 나는 친구 6명까지 재울 수 있을 만큼 이 작은 성(城)을 사랑했다.
나의 집에서 첫 파견지까지는 전철로 20분 남짓이었다.
악명 높은 일본의 출퇴근길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가까운 곳을 구했지만, 우리의 계약은 3개월짜리 시한부였다.
'잘하면 연장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고 첫 출근을 했다.
회사는 보안에 민감해 출근은 정맥'인증으로 이루어졌다.
출근 후 자기소개를 하고, 모두 함께 줄을 서서 지문과 정맥을 등록했다.
여기까지는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이 최첨단 시스템은 허술했다.
특히 손이 차가워지는 겨울에는 인증 불가를 외치기 일쑤였다.
점심시간에는 문을 통과하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생기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5분 넘게 손을 비비며 기계와 씨름하는 날도 있었다.
첨단 기술의 배신이었다.
사무실에서는 사물함에 휴대폰과 개인 짐을 넣고, 투명 가방에 종이 설명서와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야 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정직원들이 만든 매뉴얼을 보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었다.
사진까지 첨부된, 더없이 친절한 매뉴얼이었다.
문제는 매뉴얼대로 해도 자주 에러가 터진다는 점이었다.
우리(파견 사원)에게는 원인을 파악할 권한이 없었기에, 에러가 나면 작업은 중단되고 무한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알고 보니 나의 첫 회사는 단순한 파견 회사가 아니었다.
'파견의 파견'이었다.
고객사가 '갑', 우리 위 파견사가 '을'이라면, 우리는 '병'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을'에게 보고하고, '을'은 다시 '갑'에게 도움을 청하는 복잡한 구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을'들이 우리와 비슷한 또래라 호의적이었다는 점이다.
퇴근 후 회식이 있으면 자연스레 함께 했고, 금세 친해져 주말에도 같이 어울려 놀았다.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은 인물은 우리 팀의 정직원 리더였다.
그녀는 카바쿠라(유흥업소) 출신이었는데, 그 내공은 노래방에서 제대로 폭발했다.
신들린 듯 탬버린을 흔드는 손목 스냅과 완벽한 추임새는 프로의 경지였다.
덕분에 우리는 노래방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격렬한 춤사위를 펼치며 도쿄의 밤을 불태웠다.
모든 스트레스는 탬버린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그렇게 뜨거운 3개월이 지나갈 무렵, 차가운 현실이 닥쳤다.
프로젝트 자금 부족.
우리의 계약은 연장 없이 그대로 종료되었다.
재계약은 없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회사에서 나를 좋게 평가해준 덕분에 다음 근무지가 바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동기들과는 헤어졌지만, 그 3개월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사다리를 오르내리던 나만의 성(城)을 얻었고, '병'으로 일하는 사회의 쓴맛과, 탬버린을 흔들며 웃고 떠들던 사람들과의 단맛을 동시에 배웠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현장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