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진 귀향

마스크의 시대

by chacha

2019년, 내가 일하던 곳은 도요스였다.

도쿄 올림픽 준비로 도시 전체가 부산했다.

선수촌 공사가 한창이었고, 길거리에는 오륜기와 슬로건이 붙었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니.’

괜히 들떴다.

티켓 추첨이 시작되었고, 나도 여러 종목에 응모했다. 양궁, 펜싱, 축구…

이것저것 넣다 보니, 뜻밖에도 축구 결승에 당첨됐다.

그땐 그게 세상에서 제일 큰 행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시기, 코로나가 슬그머니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남의 일 같았다.

그러다 회사에서 확진자가 나오면서, 현실이 되었다.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었고,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보이면 일단 사두는 게 습관이 됐다.


우리 회사는 하청의 하청쯤 되는 ‘병’ 위치라, 상위 회사 직원들에게 마스크를 보내주는 일도 했다.

열 장을 소분해 택배로 보내주면 삼일씩 사용해 한 닻을 버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는 확산되었고 결국 회사는 결단을 내렸다.


당시 사내 식당이 있긴 했지만 양이 적어 대부분은 밖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회사는 이를 막기 위해 무료 도시락을 배포했다.

조금이라도 외부 접촉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도시락은 의외로 맛있었다.

메뉴는 함박스테이크나 생선구이.

적은 월급에 무료 도시락은 감지덕지였기에 항상 신나게 먹었다.

그 도시락이 하루 중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도시락으로도 이기지 못 한 코로나로 인해 결국 전 직원의 재택근무가 결정됐다.

무료 도시락

코로나 덕분에 인생 첫 재택이 시작됐다.

재택근무는 생각보다 고요했다.

3평짜리 방 안에서 일하고, 밥 먹고, 잠들었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하늘길이 막히자 외로움이 더 깊어졌다.

언제든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사람들을 무기한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잠시 입국이 허용되면서 격리를 조건으로 한국에 들어가게 됐다.

일주일간의 격리를 마치고 가족을 만났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계신 병원을 찾았다.


할아버지는 예전보다 많이 마르셨다.

이불 밖으로 나온 발을 살짝 덮어드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는 말없이 차를 돌렸고 엄마와 나는 직감적으로 병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손이 떨렸고 나는 삼촌들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할아버지는 숨을 거두셨다.

2년 만에 찾아온 큰손녀는 그렇게 임종을 함께했다.

따뜻하던 발이 식어가며 ‘죽음’이라는 단어가 현실이 되었다.

아빠는 “이제 편히 쉬시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3일간의 장례를 마치고, 나는 다시 저녁 비행기를 탔다.


그때 깨달았다.

젊다고 해서 가족의 시간이 멈춰 있는 건 아니라는 걸.

할아버지의 죽음은 곧 부모님의 건강으로 이어졌고,

가족 곁에 없는 것이 두려워졌다.

3평짜리 방 안에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외롭게 이곳에 있는 것보다 가족 곁에 있고 싶다.’


3평짜리 방 안은 점점 더 좁아졌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계속 재택이라면, 한국에서도 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의 일본에서의 첫 이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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