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의 추억

선배 단미(斷尾) 시켜드리기

by chacha

# 새로운 시작, 조건은 세 가지

1호 외국인이 되기로 한 이상,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사였다.

지긋지긋했던 왕복 5시간 출퇴근의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만큼은 꽤나 신중하게 집을 알아봤다.

나만의 기준은 명확했다.

딱 세 가지.


첫째는 지하철 노선이 두 개 이상 지나는 곳.

잦은 인명사고로 멈춰 서는 도쿄의 지하철을 생각하면, 돌아갈 길이 있다는 건 마음의 평화를 의미했다.


둘째는 월세 7만 엔 미만.

회사 기숙사를 나오면 이제 월세는 온전 히 내 몫이다.

월세 보조는 없다.

심지어 일본은 2년에 한 번씩 월세 한 달 치에 해 당하는 갱신료와 화재 보험비까지 내야 한다.

아직 지갑이 얄팍한 사회초년생에게 7만 엔은 심리적 마지노선이었다.


마지막은 조용하고 벌레 없는 2층 이상의 집.

하루의 대부분을 밖에서 보내는 만큼, 집만큼은 완벽한 휴식처가 되길 바랐다.

자연이 가까운 한적한 동네이면서도, 시골의 불청객인 벌레는 피하고 싶었다.


이 세 가지 기준을 들고 발품을 판 끝에 '이나다즈츠미'라는 동네를 만났다.

내가 고른 집은 타마강이 흐르는 산 동네의 아늑한 복층집이었다.

관리비를 포함해 월세 6만 5천 엔에 사랑스러운 다락방까지 딸려 있었다.

집 계약을 마치자마자 한인 커뮤니티를 샅샅이 뒤져 귀국하는 분들의 짐을 물려받았다.

운 좋게도 냉장고, 세탁기, 침대, 책상 같은 필수품들을 무료로 얻고, 티비나 전자레인지는 저렴하게 구매하였다.

5만엔 남짓한 비용으로 이사를 마치고 나의 공간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진정한 독립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했다.


#홀로 서는 법을 배우다

나의 새 회사는 신주쿠에 있었다.

동기 없이 홀로 입사한 나는, 회사가 마련해 준 외부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도쿄역 근처 교육장에서 만난 20명의 연수생 중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3개월간 이어진 교육과 시험, 낯선 상황극 속에서 나는 일본어로 비즈니스 문서를 쓰는 법 을 익혔다.

매일 저녁, 그날 배운 것을 정리해 부장님께 보내는 보고서는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훈련과도 같았다.


연수가 끝나고, 나는 '기반구축팀'에 소속되었다.

고객사의 주문에 맞춰 클라우드 시스템을 설계하고 현장에 나가 설치하는 일을 맡았다.

영업에 능한 부장님과 내가 만나본 여성 중 가장 유능했던 리더, 그리고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팀을 이뤘다.


#데이터센터의 추억 (feat. 선배의 꼬리)

내가 배치된 곳은 '기반구축팀'.

그중에서 도 'NetApp'이라는 미국 클라우드 장비를 다루는 팀이었다.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고객의 요구에 맞춰 클라우드를 설계하고, 직접 현장에 가서 설치까지 하는 일이었다.

매달 출장이 잡혔고, 덕분에 일본 구석구석을 누비게 돼었다. (출장은 다음 편에 계속!)


팀원은 부장님, 리더, 그리고 사원 셋.

총 다섯 명의 단출한 구성이었다.

특히 우리 팀 리더는 내가 본 여성 중 가장 일을 잘하는, 그야말로 '커리어 우먼'의 표본이었다.

이분 옆에만 있어도 배울 게 넘쳐흘렀다.


우리의 주된 작업 공간은 공항 근처 데이터센터였다.

이삿짐센터의 창고 한편을 빌려 쓰는, 어딘가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고객의 요구사항을 검증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며 클라우드 엔지니어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대부분의 날은 평화로웠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하루가 있다.

부서에 배치된 지 한 달쯤 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그날따라 유난히 화장실을 자주 찾던 한 선배가 있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그는 개운한 얼굴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때 터졌다.

앞서 걸어가는 선배의 등 뒤로, 무언가 하얀 것이 꼬리처럼 달려 있는 것을 보고야 만 것이다.

길게 늘어진 티슈는 종아리까지 찰랑거렸다.

그게 왜 거기에 달려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굳이 하지 않겠다.


나와 동료는 순간 눈이 마주쳤고, 우리의 동공은 흔들렸다.

이대로 전철을 타면 도쿄의 중심지, 시나가와역까지 저 꼬리와 함께 가야 한다.

역까지는 도보 10분.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했다.


이대로 만원 전철을 타는 상상에 아찔해졌다.

나는 1년 선배인 동료를 쳐다봤지만, 그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입사 한 달 차 신입인 내가 자존심 강한 선배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꼬리 선배와 함께 만원 지옥철을 타는 건 더 최악이었다.

우리의 속도 모르는 선배는 신나게 저녁 메뉴를 읊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남자 동료에게 앞으로 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수그렸다.

신발 끈을 묶는 척 주저앉아, 재빨리 선배의 등 뒤에서 찰랑이던 티슈를 끊어냈다.

평소 길에 쓰레기 하나 버리지 않는 나지만, 그 꼬리를 주머니에 넣을 용기는 차마 없었다.

조용히 길가에 내려놓았다.

죄송하지만 그 순간 경찰분이 계셨어도 나는 투기하였을 것이다.

동료는 그런 나를 보며 말없이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날, 우리 사이에는 작은 비밀이 생겼고, 그 비밀만큼의 유대감이 쌓였다.


그 외 데이터센터에서의 일은 작은 에피소드들의 연속이었다.

검증과 구축의 평화로운 시간들.

그 평화로움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고객들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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