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을위한 나라는 없다.
집 나온 초딩들이 갈 수 있는 곳이란 별로 없었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끼리 갈 수 있는 도서관도 지금처럼 많이 없었고 엄마 아빠의 부부싸움의 충격으로 사고가 멈춰버린 머리론 어디를 가야 머리를 식힐 수 있을지도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초등학생이 머리를 식혀야 한다니... 잔인했다. 일단은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러나 버스를 타는 것은 내게 약간의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생은 아직 혼자 버스를 타 본 적이 없는 초자였기에 유사시에 내게 도움을 줄 수 없었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나도 이제 겨우 버스를 혼자 타본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엄마 심부름으로 집에서 두정거장 떨어진 전화국에 전화요금을 내러 갔던 두어 번의 경험이 다였다. 특히나 그때부터 이미 길치였던 나는 나 하나도 벅찬데 동생까지 데리고 가야 하는 이여정이 적잖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겨우 네 정거장의 거리가 네 시간만큼 지루하고 고달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무려 어린이 대공원을 가는데도 전혀 신이 나지 않았다. 버스를 올라타면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찰나의 두세 걸음 차이에 있던 동생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버스에 올라타기 전 맡아지던 타이어-버스 타이어가 우리의 허리까지 올만큼 우리는 작은 아이들이었다-의 메케한 냄새는 그날의 기억을 시각과 후각을 총동원하여 아직도 내 어디쯤에 달라붙어 있다.
우리만 빼고 세상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우리 또래의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손잡고 공원으로 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그 집엔 부부싸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럴 리가... 우리는, 나는 그들의 깜찍한 연기 앞에서도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나에게 적어도 내가 아는 세상에서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 부부란 존재하지 않았다. 경험한 것만을 믿는 나는 나중에 아주 나중에야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 부부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해 보고야 믿을 수 있었다. 나야 그렇다 쳐도 이 가증스러운 장면을 부러운 눈으로 목격하는 동생이 안쓰러워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밥 먹을래?”
“배 안고픈데?”
“그래도 가자”
“안 고픈데...”
배가 안 고프다는 애를 억지로 끌고 매점으로 갔다. 이럴 때면 얘는 제법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었다. 공원 안 매점엔 변변히 먹을 것이 없어서 말라빠진 정체모를 햄버거 두 개와 우유 두 개를 사서 마른입에 욱여넣었다. 드럽게 맛이 없었다. 기분도 드러웠다. 모든게 드러웠다. 세상도 날씨도. 내 기분 따윈 고려하지 않고 지맘대로 날씨도 드럽게 좋았다. 그날은.
그전에 학교에서 소풍으로 이곳에 왔을 때는 모든 것이 다 재미있어서 소풍이 끝나가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는데 그날은 모든 것이 심드렁했다. 바이킹도 청룡열차도 땡기지 않았다. 다행히 동생은 놀이기구에는 위로를 받는 듯했다. 쟤라도 좋아하니 다행이다 생각하며 이것저것에 돈을 써댔다. 그 당시 오천원은 하루치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았다. 써도 써도 돈이 남았다. 얘라도 기뻐한다면 그 아이의 불행이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다 써 줄 참이었다. 누나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