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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S, 회상 그리고, 입맞춤

EOS KISS - 007

by hongrang


철컥~~ 찡이잉.

오랜만에 들은 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EOS KISS라는 이름을 처음 봤을 때는 사실 이 카메라가 필름인지도 몰랐다. 디지털 SLR과 너무나 똑같은 모습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메라 뒤쪽의 뚜껑을 열자 필름이 들어가는 공간이 나타났다.

1993년에 출시된 캐논의 보급형 SLR, EOS KISS였다.

스크린샷 2025-04-14 오후 4.21.27.png

캐논의 EOS 시리즈는 내게 특별한 추억을 간직한 모델이었다.

90년대 말, 웨딩스튜디오에서 처음 내 손에 쥐어진 것이 EOS 5였으니까. 행사사진은 한 컷 한 컷이 돈이었고, EOS 5의 빠른 연사와 정확한 초점 덕분에 몇백 롤이나 되는 필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디자이너였고, 그 카메라는 내 밥벌이의 수단이었다.

사진이 무엇인지, 순간을 담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그러나 그렇게 열정적으로 찍었던 EOS 필름 카메라는 어느 순간 내 기억에서 멀어졌었다.

디지털로 전환된 EOS 5가 카메라 시장을 다시 한번 휩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1993년에 나왔던 EOS KISS가 손에 들어왔을 때는 무척이나 낯설었다.

마치 오래전에 잊혀진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이랄까.

스크린샷 2025-04-14 오후 4.34.40.png 봉정사 입구
스크린샷 2025-04-14 오후 4.34.46.png 지금은 모습이 달라진 봉정사

EOS KISS는 특출 난 모델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사골처럼 푹 고아낸 듯한 편안함과 안정감을 지닌 보급기였다. 자동차로 치면 아반떼 같은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까? 1/2000초의 셔터속도, 정확한 초점, 다중노출 기능까지 요즘의 디지털카메라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카메라를 들고 겨울 거리를 걸었다. 차가운 공기와 선명한 햇살 아래서 EOS KISS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게 반응해 줬다. 작고 가벼운 바디에 펜케익 렌즈를 붙이자 자동카메라 못지않은 휴대성이 생겼다. 간편하게 들고 다니면서 거리 사진을 찍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합이었다.


철컥~~ 찡이잉.

그 작은 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 필름 한 롤을 다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000548030003.jpg 아직 녹지 않은 눈사람
000548030004.jpg
000548030006.jpg 현대식 건물에 비친 구옥의 지붕
000548030009.jpg 한겨울의 아아

겨울날의 햇빛을 담아낸 첫 필름을 현상하고 나서야, 왜 이 카메라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진 속의 인물은 부드럽게 아웃포커싱되어 있었고, 거리의 풍경은 선명하면서도 따뜻했다.


카메라는 기계가 아니라 결국 감정의 매개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 유리잔에 담긴 커피의 모습, 골목길을 채우는 정겨운 풍경, 그리고 아직 녹지 않은 눈사람의 표정까지—EOS KISS는 일상 속 작고 소중한 순간들을 담아내기에 더없이 좋은 카메라였다.

필름 카메라의 매력은 때로는 특별하지 않은 데서 온다.

너무 뛰어나지 않기에 더 마음이 가고, 부족함 없이 편안하기에 자꾸만 손이 간다.

EOS KISS는 그런 카메라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물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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