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정문 앞, 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아파트는 대체 무엇이며 어떤 의미일까?
최근 새로 지은 신축 아파트에서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제한해 크고 작은 잡음들이 일고 있다. 신축 아파트에서는 보통 지하 주차장을 통해 차량이 이동하는데, 몇몇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 높이 제한에 택배 차량들이 진입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신축 아파트일지라도 지상으로의 차량 출입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화재와 같은 비상시에 차량이 진입할 수 있게끔 설계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택배 기사들은 지상 출입을 요구했으나, 주민들은 아이들을 비롯한 입주민의 안전상의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택배 차량을 지하주차장 높이 제한에 맞게 개조하거나 택배 카트를 이용해 각 세대에 배달할 것을 요구했다.
안전을 담보한 이 요구는 일면 타당하나, 사실 택배 기사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불합리하고 이기적인 요구일 수밖에 없다. 우선 택배기사들은 개인 사업자이기에 시간 내에 배달 가능한 택배 개수가 곧 임금이며, 차량 개조 시 비용을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더불어 지하 주차장 높이 제한에 맞게 개조 시에 탑재 가능한 택배 물량이 그만큼 줄고, 이에 따라 수입이 줄거나 일을 더 오랜 시간 할 수밖에 없다. 또한 높이가 낮아진 차량 안에서 물건을 상하차 하려면 늘 허리를 숙이고 일해야 하는데, 그런 상태로 매일 일 한다면 허리와 건강에 자연스레 무리가 가게 된다.
또 택배 카트를 통해 아파트 단지 모든 세대로 택배를 배달하면서도 자신의 몫을 시간 내에 소화하는 것은, 신축 아파트 단지 구석구석을 한 번만 산책해본다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배달한 택배의 개수만큼 돈을 받는 택배 기사의 입장에서 이 요구는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요구이다.
이러한 갈등에서 일면 비슷한 직종인 배달업 또한 자유롭지 않다. 오토바이는 지하주차장 높이 제한에 걸리진 않지만, 비나 눈이 오는 날 지하주차장의 바닥 마감재는 너무 미끄러워, 두발을 땅에 내려놓고 천천히 가더라도 바퀴가 헛돌아 넘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그런 날만이라도 지상 출입을 하게 해달라고 요구해보지만 쉽게 허가되지 않은 것이 현실이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걸어서 배달을 완료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래도 이런 아파트는 그나마 양반이다. 그저 배달 오토바이라는 이유로 지상이든 지하이든 출입을 일체 통제하는 아파트도 많다. 위험하고 시끄럽다는 이유로 무조건 단지 밖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걸어서 배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심지어 배달 기사 진입 시 헬멧을 벗게 해 신분증과 함께 카운터에 맡겨두고 올라가게 하는 곳도, 배달 기사들은 오직 화물 엘리베이터 만을 이용하게 하는 곳도 있다.
자기 자신도 하루 종일 시끄러울 텐데 굳이 머플러를 불법 개조하여 소음을 유발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나로서는 도저히 알 길도 없고,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기껏 힘써 일하려다 마주한 거절과 차별 앞에 선 이의 마음은 안다. 그저 성실하고 묵묵하게 자기 일을 하다가 입구에서 거절당하고 하대 받은 배달 기사들은, 자신의 생업이 그리고 그 업에 종사하는 자신이 결국은 사회 안에서 천대받고 있다고 느낀다. 난 그저 살아가기 위해 돈을 벌러 왔을 뿐인데 불현듯 세상의 불청객이 된 기분이다. 이런 거절당하는 경험은 처음엔 분노와 짜증스러운 감정을 유발한다. 그렇게 마찬가지로 그저 자신의 일에 충실할 뿐인 경비원과 실랑이를 하고 말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불현듯 을과 을의 부질없는 싸움일 뿐임을 깨닫게 되고 이내 체념한다. 그 체념을 반복할수록 높은 가능성으로 자기 비하가 되곤 하더라. 이 자존심과 마음의 상처에 비하면 배달 시간이 늘어져 줄어든 수입의 아픔은 우습다. 그저 다음번엔 그 아파트에 가지 않으면서도 다친 자존심을 드러내지 않을 명목상의 이유가 될 뿐이다.
더불어 다친 마음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택배 기사나 배달 기사의 진입을 막는 아파트가 땅값이 비싼 동네를 위주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애초에 지상으로 차량이 다니게 설계되었던 구축 아파트에서도 말이다.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하면 괜스레 서글퍼지는 시간이 자꾸만 쌓여간다. 그래서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눈과 생각의 초점을 놓은 채 일해야만 하는 순간이 늘어만 간다.
얼마 전엔 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고등학생의 글이 화제가 됐다. 입주민의 요구로 시작된 매일 아침 경비원의 90도 인사에 오히려 마음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죄스럽고 부끄럽다며 아파트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인 것이다. 이 사태에서 드러나듯이 인간 집단의 이기심과 배타성은 반복되고, 반복될수록 더 잔인해진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일은 자꾸만 반복될까? 이와 같은 기사의 댓글들을 보면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누군가의 위에 서고 싶은 탐욕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사실 모양만 더 복잡해지고 교묘해졌을 뿐, 인류사에 계급과 더 높은 곳을 쟁취하기 위한 폭력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는 이 시대의 계급도는 아파트를 통해 나타나며, 우리 시대는 아파트의 차별성과 가격이 계급장인 시대일 뿐이다.(평생 아파트에 살아본 적 없는 우리 가족과 같은 가정들은 어디쯤에 있을까) 오죽하면 대장 아파트란 말이 생겼을까? 그러니 입주민 회의에서 집단 이성이 정작 개인의 이성과는 반대되는 선택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 높은 위치를 위해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계급의 이성이기 때문이다.
새로 짓는 아파트의 이름과 정문의 모양이 갈수록 더 화려해져 간다. 어떻게든 더욱 고급스러워지려고, 그렇게 더 특별해지고 높아지려고 부득부득 노력한다. 그런데 그저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등굣길을 줄여보려는 이웃한 아이들마저도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삭막함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사는 것일까?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이며 나라의 미래라던데 휴거(휴먼시아 거지), 빌거(빌라 거지), 이백충, 삼백충으로 친구마저도 사는 자리와 부모의 재력으로 재단하는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꾸며 사는 것일까?
곱씹을수록 오징어 게임보다 더 지독한 이 계급 게임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다.
성공하고 싶지 않다. 살아남고 싶지도 않다. 정말이지 그냥 살고 싶다.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