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자식 사이의 인연의 끈에 대하여
무엇이 가장 좋은 ‘효도’일까? 용돈을 많이 드리면 효도일까? 자주 인사를 드리면 효도일까? 아니면 효도여행을 보내드리거나, 선물을 드려야만 효도일까?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나는 ‘가슴에 못을 박지 않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 그 어떤 일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아버지는 0점짜리 아들이었다. 물론 아버지로서도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아들로서의 역할은 더더욱 못했다. 늘 문제만 일으켰고, 술을 좋아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날도 많았다. 여러 문제로 어머니와 자주 다투다가 결국 이혼을 했고, 할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기도 했다. 특히 그날은 심했다.
10살 꼬마의 공포의 밤
10살 때 어느 깊은 밤, 유난히 깊이 잠든 날이었다. 곤히 자고 있었는데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잠들어있는 나를 사이에 두고 큰 소리로 말다툼을 하고 계셨다.
“아니, 엄마가 그래 말하면 안 되지!!”
“애 듣겠다 조용히 말해라”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아 진짜!!!!”
“왜 이러다가 부모 한 대 치겠다. 쳐라! 쳐라!”
“아 됐다 내 애 데리고 나간다”
“그래 나가라 잘됐네”
어찌나 분위기가 험악했던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괜히 안 자고 있는 것을 들켰다가는 혼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앞의 대화를 듣지 못해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괜히 나 때문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조용히 흐느끼다 어느새 지쳐 다시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아버지가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할머니랑 따로 살 거라고 했다. 마음속으로는 싫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젯밤 다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두말없이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집을 알아본다며 나가셨다. 할머니는 아랫방에서 조용히 벽에 기대어 앉아 계셨다. 아무 표정도 짓지 않으셨지만 슬픔이 가득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위로도 건넬 수가 없었다.
며칠 뒤, 실제로 이사를 했다. 할머니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의 반지하 월세방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괜히 내게 미안하다며 당시 고가였던 컴퓨터를 사주셨다. 할머니는 마음의 상처가 깊으셨는지, 육지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가덕도로 떠났다.
하지만 할머니는 혼자 지낼 손자가 걱정되어 다시금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오셨다. 그리고 수시로 집에 들러 빨래며, 청소며, 집안일을 해주셨다. 명절에는 제사상도 차려주셨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아직 불편했는지 서로 잘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사이에서 말을 전달해야 했다.
“아빠 할매가 친척 누구 돌아가셨다고 가야 한대.”
“할매~ 아빠가 이번 달에 돈 좀 빌려달래”
그렇게 몇 년을 가족도 아니고, 남도 아닌 어색한 사이로 지내야 했다.
예기치 못한 사고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날은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는데, 학교를 마칠 즈음에 할머니께 전화가 왔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흐느낌이 느껴졌다.
"할매 왜요~"
“훈아. 너거 아빠 사고 났단다. 어짜노 흑흑”
다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당시 아버지는 직장을 잃고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며 공사장에 갔다가 지붕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수술실 앞에서 펑펑 울고 계셨다. 할머니의 흐느낌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만 알았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허리에 영구적인 장애를 얻었다. 그 뒤로 할머니는 매일같이 집에 와서 아버지의 수발을 들어주었다. 차라리 같이 사는 게 어떠냐고도 해보았지만, 그건 또 싫다고 했다. 그렇게 다시 불편한 관계로 몇 년을 보냈다.
아버지는 사고 이후로 성격이 많이 유해지셨다. 본인이 원해서 변했다기보다는 신체적인 장애가 생긴 이후, 몸이 불편해지니까 마음까지 약해진 것 같았다. 이후 술로 하루를 보냈고, 집안에 갇혀 지내는 날이 많았다. 세상 누구보다도 무기력했고, 삶의 의지나 목표 따위도 사라진 듯했다. 할머니는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부모 자식의 연이라는 건
아버지 사고 당시의 할머니 눈물을 잊을 수 없다. 그 모질던 자식이 뭐가 걱정이 된다고, 한달음에 달려와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아버지가 얼마나 할머니께 많은 잘못을 했는지 보아왔기에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할머니는 아무리 멀고 서먹한 사이라해도, 핏줄로 이어진 부모 자식 간 인연의 끈을 차마 놓을 수 없었나 보다.
“키스해주는 어머니도 있고, 꾸중하는 어머니도 있지만 사랑하기는 마찬가지”라는 펄 벅의 말처럼 그저 할머니 눈에는 아버지도 사랑한다고 표현하지 못할 뿐, 사랑하는 자식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할머니 가슴에 몇 번이나 대못을 박았다. 한 번 박힌 가슴의 못은 다시는 뺄 수가 없다. 혹 상처는 아물더라도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 때라도 할머니의 흉터를 어루만져 드렸어야 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효도할 기회가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