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손이나 발이 묶이는 ‘결박’이라는 것을 당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혹은 주변의 누군가가 결박당한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아마도 강도와 같은 범죄를 당하거나, 반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결박당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흔치 않은 경험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결박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어딜까? 경찰서? 군대? 교도소?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요양병원'이 아닐까 한다. 요양병원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환자의 손을 결박하는 경우가 많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자꾸 침대 밑으로 내려오려고 해서 낙상의 위험이 있거나, 환자가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의 폭력성을 보일 때면 병원에서는 환자의 손을 결박할 수밖에 없다. 너무나 현실적인 이유이고,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박당하는 환자가 가족인 경우에는 얘기가 달랐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지만, 그때 느껴지는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속상했다.
요양병원 첫인상
할머니 치매가 심해지고, 다시 좋아지기 힘들 거라는 진단을 들은 이후, 가족 간 회의를 거쳐 일단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했다. 지금 당장 대소변도 가리기 힘든 할머니를 내가 돌보기 힘들 거라는 판단이었다. 차라리 일반 병원에 모시고 싶었지만, 할머니의 혼잣말이 점점 심해져서 그럴 수도 없었다. 또 국가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은 치매를 입증하는 절차가 까다로웠고,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오래 두고 싶지는 않았다. 치매가 심해져 자꾸 혼잣말을 하셨지만, 예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에도 비슷한 증상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예전처럼 다시 회복하실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도 품고 있었다. 군 입대까지는 3개월이 남은 상태였고, 그 안에 건강을 찾으시길 간절히 바랐다.
내가 요양병원을 기피했던 이유는 요양병원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를 모시기 전, 미리 가보았던 요양병원에는 '생기'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대부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침대에 누워있었고, 주무시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는 마치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여기에서는 멀쩡한 사람도 병에 걸릴 것만 같았다.
잠깐만 계세요 할머니
“할매, 딱 한 달만 여기 계세요. 한 달 있다가 집에 같이 가요”
할머니가 집에 가자고 할 때마다 한 달만 계시면 집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할머니를 달래기 위해 했던 거짓말일 뿐이었지만, 마음 한 편으로는 '정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도 있었다. 예전처럼 조금만 더 좋아지면, 대화만 가능하다면 언제든 집에 모시고 가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날 이전까지는.
요양병원에 모시고 나서 매일 병원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갈 때마다 할머니를 돌봐주는 요양보호사 분들과 간호사 분들께 감사인사를 전하고, 항상 경과를 묻고는 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날도 할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할머니는 좀 어떠세요?”
“식사도 잘하시고, 말씀도 잘하세요. 그런데…”
“네? 어디 안 좋으세요?”
“자꾸 밤에 집에 가고 싶다고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셔서…”
“아… 죄송합니다.”
“아니오 그게 아니라. 밤에는 상주인원이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내려오시다가 중심이라도 잃으시면 낙상사고 위험이 있어서요. 밤에만 침대에서 못 내려오시게 조치를 취해도 될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때만 해도 어떤 조치를 취한다는 것인지도 몰랐다. 단순히 일찍 재우기 위해 수면제를 쓰거나, 식사시간을 조절하는 정도의 조치를 한다는 것인 줄만 알았다.
좌절
다음날 아침 병원에 갔을 때, 할머니를 보자마자 다리가 풀려버렸다. 할머니의 양손은 침대 양쪽의 낙상 방지 울타리에 묶여있었다. 물론 포승줄이나 수갑 같은 것은 아니었다. 전혀 통증이 없을 만큼 커다랗고 푹신한 장갑에 손이 넣어진 채로 묶여있었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제 말했던 낙상방지 조치라는 것이 손을 움직일 수 없도록 결박한다는 것이었다. 간호사에게 물었다.
“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처음에는 한쪽만 묶었는데, 자꾸 반대쪽 손으로 풀고 내려오시려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요...?”
“처음에 오시는 분들이 종종 이러는데, 대부분 적응하시고 괜찮아지시면 풀어드려요.”
그래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는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나빠지셨다. 매일같이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런 할머니를 억지로 달래고 올 때면 병실 밖에 서서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그때까지도 언제든 상태가 괜찮아지신다면 집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군입대를 연기하거나, 방위산업체에서 대체복무를 해야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갔다. 군 입대일이 가까워왔지만,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더 이상 어떤 기대도 가지기 힘든 시점이 되었을 때, 결국 입대를 했다. 자대 배치 후 신병 상담을 하는 중에 ‘할머니께 마음의 짐이 있다. 할머니를 보러 가야 된다’고 간부 앞에서 어찌나 눈물을 흘렸던지, 그날 이후 눈 여겨봐야 할 관심병사가 되어 버렸다. 당시에 그만큼 쉽게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왜 탈영을 하는지, 왜 자살을 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우리 할머니를 뵙고 왔다고 했다. 할머니는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리고 SNS에 할머니 사진을 올려놨으니 보고 안심하라고 했다. 활짝 웃는 할머니의 사진을 보고 눈물을 한바탕 쏟은 후에야 군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공간이 고통이 된다는 건.
다행히 내 사정을 들은 중대장의 배려로 자주 휴가를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부대에서는 9박 10일인 정기 휴가를 둘로 쪼개어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나 역시도 포상휴가라는 목표가 생기면서 군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이후 후임에게 포상휴가를 양보해도 남을 정도로 포상휴가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복무 중에도 그럭저럭 할머니를 자주 뵐 수 있었다.
할머니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갔다. 혼잣말도 조금은 줄어들었고, 더 이상 집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요양병원에 가는 일은 언제나 가슴 아팠다. 죄수가 교도소로 들어가는 기분이었고, 도살장에 들어가는 가축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요양병원이라는 공간은 매주 벌을 받으러 가는 고통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그곳에만 가면 모든 것이 다 후회가 되었다. 인생에 만약은 없다지만, 머릿속은 온통 '만약'으로 채워졌다. ‘만약 그때 할머니께 화를 내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할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시지 않았더라면’ 너무 괴로운 나날이었다. 가장 큰 고통이자 후회는 “왜 그땐 몰랐을까…”였다.
누구라도 이 글을 읽는다면 반드시 주위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한 번 떠올려봤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더 이상 기억을 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기억까지 점차 잃어가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위지안의 저서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라는 책에는 "정성이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매일 지속되는 사소함에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 나는 알지 못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나 역시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들어가고 나서야 깨달았다. 진정으로 후회되는 것은 할머니께 거창한 이벤트를 못 해드려서가 아니었다. 그저 뜨끈한 쌀밥에 미역국 올린 밥상에 마주 앉아 옛날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롭고..., 아팠다. 뒤늦은 '만약'이라는 후회는 정말 고통스럽다. 부디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