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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수 Dec 25. 2023

당신의 늙음에 가여움을 느끼는 젊은이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나의 젊음에 기꺼이 함께 울어주십시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 영화 <은교> 中








   영화 <은교> 속 '늙은' 적요는 자신의 늙음을 서러워했고, 한탄했고, 아파하였다.


   적요가 그것을 속상해할 때마다 나는 어딘가 무서워졌다. 그 적요에게도 눈부시던 때가 있었을 터. 이따금 나오는 적요의 상상 속 그의 젊음을 목도할 때면, 나는 더욱 서늘해졌다.


   적요의 늙음은 결코 벌이 아니며, 은교의 젊음도 절대 상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젊었다가, 늙으니까. 그러나, 그게 내 얘기로 읽히는 건 다른 문제다. 나도 언젠가 적요가 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꽤나 두려운 일이었다.



   젊음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대개 젊음이 다 지난 후라고들 한다. 인간은 늘 손에 쥔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마음을 두고 사니 그게 당연할 테지.


   그러나 나는 안다. 나는 지금 젊고, 젊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저 아름답다.

   그리고 또 안다. 아무리 버둥댄다 한들 언젠간 이 젊음을 몽땅 다 잃어야 한다.



   지금 나는 고작 이십 대다.

   향후 몇 년은 더 이십 대고, 앞으로 10년은 거뜬히 젊음을 주장하고 다녀도 된다. 


   …그런데도 나는 두렵다.


   젊음이 다 사라진 후의 내가

   적요가 된 내가

   벌과 같은 늙음을 맞이할 내가 벌써 두렵다.



   그건 단지 늙음 자체에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다.

   벌로써 받는 늙음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아닌 게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2023년의 대한민국에서 내가 오늘 젊은 건 다행 같다. 상 같다.





   늙으면 서러운 일만 는다는데, 그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네 노인들은 늙음이라는 형벌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이 나라는 그들에게 차마 죽어달라고 하지는 못하겠고, 알아서 나가떨어지게끔 유도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젊은이들은 그들의 속도를 배려하려 들지 않는다.


   키오스크, 편하다.

   직접 내 전달사항을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되고, 화면이 가시적이라 몰랐던 메뉴도 발견하기 좋다.


   모바일 예매, 이 역시 편하다.

   굳이 창구까지 가지 않아도 모든 것을 다 침대 위에서 해결할 수 있다.


   태블릿 pc, 이건 혁신 수준이다.

   무거운 책들이 한 손에 다 들어온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무한 권의 책과 동행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엄만 점점 세상이 불편해져 간다 했다.



   엄만 1961년에 태어나 80년대에 젊음을 보냈다. 스마트폰도 없던 90년대에 이미 30대였고 지금은 60이 넘었다. 물론 키오스크도, 모바일 예매도 더듬더듬 느리지만 차근히 잘 배워 쓰신다. 그러나 내가 없다면? 이걸 친절하게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해 줄 내가 없다면? 누가 우리 엄마를 잡고 그리 알려주겠나.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는 노인들의 뒷모습에 엄마가 겹쳐 보인다. 매진된 예매 창구에서 허송하는 노인들의 한숨 속에서도, 자신들을 위로하는 이 글을 접하지 못할 단절 속에서도 엄마가 겹쳐 보인다.





"자리 하나도 없어요?"… 야구장 찾은 LG 노인팬, 매진 소식에 '허탈'

https://www.news1.kr/articles/?5226171



"앱 쓸 줄 몰라" 노인은 서서, 젊은이 앉아가는 명절 KTX

https://www.asiae.co.kr/article/2023090513530746259




   내가 사는 곳은 부산이다. 6년 간의 서울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이곳은, 새삼 놀라웠다.


   이렇게도 노인들이 많았던가. 서면이나 전포 등 몇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뉴스에서도 '노인과 바다'라며 심심찮게 부산의 인구 연령에 대해 보도한다. 그러나 그 어조들이 퍽 쓸쓸하다. 마치 그들이 죄인이라도 된 양 노인이 많은 것을 큰 문제처럼 말하니까.


   물론 문제라면 문제가 맞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이 노인은 아니다. 노인은 그저 현상일 뿐이다. 


   저출산 대한민국에서 사는 노인들은 참 가엾다. 늙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맘이 벅찰 텐데, 세상은 노인이 많아 문제라고들 하니. 내가 만약 오늘 노인이었다면 참 서글펐을 것 같다. 세상에 내가 많아서 문제라니. 나와 내 친구들이 오래 살아 문제라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말이 정녕 사실인가 보다. 그 누구도 그들을 노여워해 주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는 늙음이 두려울 수밖에.


   생기를 잃을 것이 두렵고, 찰랑이던 머리가 푸석해질 게 두렵고, 곱던 피부가 처질 게 두렵다.

   그리고 내가 이 사회에 짐짝이 될까 두렵다.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혀 뉴스에 노인뭉텅이 중 하나로 보도될까 두렵다.





   젊은이들아,

   우리도 언젠가 늙는다.


   그땐 세상이 또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그들을 소외하지 말자. 그들의 늙음을 노여워해주자.


   우리가 지금 그러지 않으면, 우리도 작금의 노인들처럼 서글픈 노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언젠간 저 기사 속 주어가 되는 날이 온다.


   그러니 지금 당장 그들에게 노여움이 생기지 않는다면 보험 넣는다 생각하고 배려를 좀 투자해 보는 건 어떨까. 그들과 공생하며 사는 건 어떨까. 그들의 아픔에 공감해 주는 건 어떨까.


   그게, 반드시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올 테니 말이다.





























    .

    .

   투자? 투자 같은 소리 하네.  


   청년 실업. 이 네 글자에 나도 포함이다.

   공부한다고 했는데. 가난한 집에서 고군분투 참 기특하게도 했는데. 나는 직업이 없다. 좋게 말해 취업 준비생이지, 내가 오늘 하루 열심히 산아낸들 무슨 돈을  수 있나. 누가 내게 월급을 주냔 말이다. 월급을 받으면 또 뭐 하나, 이 몸 하나 뉘일 곳 없는 처지인 건 매한가지다. 그래, 오늘 내가 젊고 이게 참 아름답다는 것도 알겠는데. 지금 내겐 이 아름다움을 오롯하게 만끽할 여유가 없다.


   그런데 뭐에 투자해?

   노인을 좀 배려하고 살자고? 공생하자고? 그들의 아픔을 알아주라고?

   그런 말이 들릴 것 같은가.




   그저 젊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누리고 사는 우리네 인생.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흘러가는 오늘. 나는 어쩌면 그 가운데, 행운을 맞은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젊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무 잘 아는 청춘이니까.

   근데 그런 나조차도 자주 무너진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따금은 삶이 버겁다. 솔직히 할 수만 있다만 당장이라도 이 숨을 다 끊어놓고 싶을 만큼 오늘 이 현실이 너무도 버겁다.



   아이를 낳지 않는 우리가 얄미운가. 전쟁 통에도 오 남매씩 낳아댔는데 고작 이 정도로 낳지 않는다니 징징거리는 것처럼 보이는가. 겁쟁이 같은가, 한심스러운가, 우리가 노력은 않은 채 떼만 쓰는 세대로 보이는가. 지들도 언젠간 늙을 텐데 노인들을 배려하지 않고 달려가는 우리가 그리도 야속하신가.

   미안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돌볼 여력도 없다.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는 노인의 뒷모습에 엄마가 겹쳐 보여도, 당장 내 통장 잔고가 더 속상하다.



   젊어서 좋겠다, 아름다우니 좋겠다, 우리 노인들은 한없이 속상한데 니들은 젊어 참 편하겠다, 이런 마음이 든다면 당신들도 우리를 좀 재고해 주셔라. 나도 당신들의 늙음에 마음 아파할 테니, 당신들도 우리의 젊음에 기꺼이 함께 슬퍼해주셔라. 대한민국이 버겁긴 젊은것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당신 노인들만큼이나 이 대한민국이 정말이지 너무도 버겁다.


   늙음에 가여움을 느낄 정도로 젊음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나조차도, 이깟 젊음이 다 뭔가 싶어질 때가 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픈 욕망을 참을 수 없어지는 순간이 있다.


   솔직히 그냥, 희망이 없다. 매일이 실패고 그 패배감에 자아가 죽어간다.





   자유의 시대? 자유라는 말, 참 잔인하게 읽힌다.


   이렇게 자유로운 세상에서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하는 나는 쓸모없는 인간인 것 같다. 누가 나의 길을 막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나아가지 못하냐는 꾸중을 듣는 것 같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게 전부 무능한 내 탓 같다.


  아니, 내 탓이지. 자유의 시대잖아.

  능력이 부족한 나의 탓이지.

  노력이 부족한 나의 탓이고.


   그러니 죽고 싶을 수밖에.

   능력도 없고 노력도 못하는데 정말 이깟 젊음이 다 뭐람. 아름다움을 향유할 여유가 없다.


   젊은이의 자살은 아주 멍청한 짓이라지. 내가 버리고픈 오늘이 누군가에겐 그리도 바라는 젊음이라지. 청춘이라지. 근데 그게 뭐. 아무것도 와닿지 않는다. 지금 당장 지친 내게 그런 말들은 다 어용하다.


    이 땅의 청년들이 왜 그리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는 것 같은가. 젊음이 소중한 줄 몰라서 그러겠나?

  전혀 아니다. 그건 진짜, 정말, 절대, 전혀 아니다.




  2023년의 대한민국에서 내가 오늘 젊은 건 불행 같다. 벌 같다.





‘하루 4.3명꼴’ 세상 등지는 20대… 그중 19%는 ‘생활고’였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30824004003




   우리는 역사상 가장 번화한 시대, 가장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의학의 발전, 과학의 진보는 평화에 편의를 더한다. 나같이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세상이다. 굳이 출판사를 통하고 종이를 낭비하지 않아도 이렇게 나의 글을 세상에 내어 놓을 수 있으니 말이다.


   2023년의 대한민국은 한반도 역사에서 유례없는 평화, 번영, 풍요의 시대를 맞았다. 우리가 지금 당장 일제놈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경신대기근 때처럼 자식을 잡아먹어야 생존이 가능한 처지도 아니다. 물론 여전히 정치권은 시끄럽지만 최소한 탱크를 몰아 도시를 점령하겠다는 작자들은 없으니, 이 얼마나 태평스러운가.


   그러나 그런 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모두 자신의 아픔에만 주목하는 것처럼, 역사 속 그것들을 아무리 배운다 한들 여전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사실은 무언가 희망적인 글을 적으려고 첫 줄을 뗐었다.

   지난 게시글을 올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다음 글은 젊음의 소중함에 대해 설파할 생각이었다. 

   젊음을 찬미함과 동시에 노인의 서글픔에 공감을 바란다는 글을 적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적으면 적을수록 그게 실은 나의 위선이었음을 깨달아 버린 거다.


   에이씨, 노인들 니들만 힘드냐? 나도 힘들어 나도! 우리가 이기적이라 노인들을 방치하는 게 아니고, 우리도 진짜 죽을 맛으로 살고 있다고. 진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거라고. 이런 말들이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이 브런치북에는 결코 착한 척도, 위선도 않겠다 했었다. 그게 이 브런치북의 주제의식이라 했었다.


   그래서 적어 봤다.


   희망이 아닌 절망을.

   위선이 아닌 솔직함을.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고, 나은 어른으로 살고 싶다. 타인의 아픔에 눈물 흘릴 줄 알고 싶고, 나에게만 관대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런 나에게조차도 노인들의 아픔에 오롯하게 공감해 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답도 내겐 없다. 애초에 답을 내놓으려고 쓴 글도 아니었다. 다만, 이거 하나는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노인들 중에서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모든 노인들이 오늘 젊은 문명을 어려워하는 건 아니다. 또한 젊은이들 모두가 불황을 겪고 살진 않는다. 취직 잘해서 돈 착실히 벌어 부유하게 사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부류를 평균으로 보아선 안 된다.



   자유의 시대라는 말이 갖고 있는 역설적 억압을 눈치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내는 저들이 '대단'한 것이지, 그걸 못해내는 쪽이 부족한 게 아니다.


   자유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섭냐면, 아무 탓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오늘 나의 패착에는 분명 나의 탓도 있다. 하지만 시대의 탓과 세상의 탓도 분명히 함께 존재한다. 무능력해서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니고, 노력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하는 게 아니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사실은 같은 카테고리의 슬픔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이제 그만 화해하자. 피차 같은 처지의 서로다. 아픔을 노여워해주자. 기꺼이 울어도 주자.

   그래, 나는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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