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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수 Jan 21. 2024

6개월에 한 번씩은 유서를 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나의 일부다.


   그러나 나는 살고 싶어서 살고 싶다.

   그냥 살아 있는 거 말고,

   확연하게 살아있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사는 거.


   오늘 이 커피 향이 너무 좋고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무지 반갑고

   좋아하는 책을 들고 깔깔 웃으며

   그냥 사는 거 아니고,
   하루가 아쉬워서 못 견디게 행복해서 사는 거.


   그렇게 살고 싶다.




   행복해서 울어보고 싶다.

   너무 좋아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베베 꼬다 울음이 퍽 터져버리고 싶다.


   감동하는 눈물도 흘려보고 싶다.

   네게 너무 고맙고, 너를 너무 사랑해서 우는 눈물이라면 카스피해를 다 채울 만큼 울어도 머리가 아프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언제나 죽음과 가까이에 산다.

   행복에 겨워 울었던 적은 내 삶에서 단 한 번도 없다.



 

   안다, 우울증이다.


   이 병에 언제부터 걸렸는지도 모르게 이미 만성이 되어버려 이걸 앓지 않는 내가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사람은 다 언제나 외롭고, 고독하고다하던데 혹시 나도 그 정도의 얕은 감정이려나, 바랐다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가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픈 감정을 참기 어려울 때가 많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도 눈을 뜨고 살아야함이 버거울 때가 많다.


   그냥 이대로 모든 게 다 끝났으면 좋겠다고 빌 때가 많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단순히 살고 싶지 않은 게 아니고 '이런 식'으로 사는 삶이 싫다는 말이다.


   우울한 사람이 퍽 멋져 보여 일부러 패션 우울을 착하고 사는 게 아니다.


   나는 정말로 행복하게 살고 싶다.

   아쉽게 살고 싶다.

   웃으며 살고 싶다.

   가볍게 살고 싶다.

   제발 죽음과 거리를 띄운 채 살고 싶다.


  우울하고 싶지 않다. 울고 싶지 않다.

  죽음을 고민하고 싶지 않다.

  내내 사무친 채로 살고 싶지 않다.


  겨우 버텨야 사는 삶에서 이제는 제발 벗어나고 싶다, 정말이다.




   그러기 위해 많은 걸 하고 산다.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해준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주고, 언제나 깔끔하게 집도 청소해 주고, 건강하게 지내고 싶어서 주기적으로 운동도 한다.


   이뿐이랴, 나는 나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라 내가 좋아하는 거만 골라서 참 잘해주고 산다.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장소,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말, 좋아하는 사람, 편안한 시간, 편안한 마음, 편안한 말들.

   내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게 뭐든 다 기꺼이 해준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걸까.



   병원에도 다녀봤다.

   선생님, 제가 일곱 살 때부터 쭉 이래요. 가끔 죽고 싶다는 충동을 참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열네 살에는 자살 시도도 했었어요. 이젠 그렇게 되기 전에 저를 달래는 방법을 터득했지만요. 가끔은 이게 다 뭘까 싶게 놓아버리고 싶은 때가 있어요. 정말 정말 살고 싶은데, 너무 너무 죽고 싶어요.

   살고 싶어서 살고 싶어요.

   죽지 못해 사는 거 말고요, 웃으면서 살고 싶어요.


   스물넷, 1년 내내 다닌 병원에서도 별 달리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밝은 햇빛도 매일 본다.

   자주 걷고, 잘 먹고, 친구도 많이 만나고, 엄마랑도 가까이 살고, 쓰레기를 쌓아두지도 않고, 할 일을 미루지도 않고.


   내가 얼마나 나를 위해 열심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죽고 싶어 한다.


   밝은 햇빛 아래서도 나는 죽음을 고민한다.

   깔끔히 치워진 집에서도 엉망인 마음이 든다.

   친구들과 하하 웃는 순간에도 당장 울음이 터질 거 같이 감정은 요동스럽다.


   이 글도 얼마나 예쁜 곳에 나를 앉혀두고 쓰는지 아는가.

   얼마나 맛있는 디저트를 입에 넣어주고 있는지 아는가.

   이곳에 오기 위해 아침부터 나를 얼마나 치장했는지 아는가.


   절망스럽다.

   뭘 해도 이 감정은 언제나 나를 지배 중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나의 일부다.

   이제는 이걸 그만 인정하고 그냥 내내 이런 채로 살아야 되나 보다 싶다.




   죽음과 거리를 띄우겠다는 나의 애처로운 마음은 오히려 언제나 죽음과 거리를 좁히는 삶임을 방증하고 있다. 진짜로 잘 사는 사람들은 죽음과 거리를 띄우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산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비정상으로 살았더라.

   뭘 묻나, 알면서.



   아빠랑 엄마랑 살 때. 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매일 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엄마는 맞고 도망가기 일쑤였고, 아빠는 나도 때렸다.


   둘이 이혼만 하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엄마의 새 남자와 살면서부터는 더 심했다.


   내가 아빠도 아닌 그 남자에게 학대를 받을 때, 엄마가 아빠도 아닌 그 남자에게 맞을 때가, 더 아팠다.


   집에 가기 싫어 빙빙 둘러 하교하던 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매일 울면서 집으로 기어가던 그 하굣길이 오늘도 너무 선하다.



   지수,

   그건 네가 선택하지 않은 일들이었잖아.

   다만 운이 조금 나빴을 뿐이야. 너는 지금 어른이고. 너무 좋은 어른으로 컸고. 서울에서 대학도 나왔고. 오늘 이렇게 좋은 데서,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얼마나 자유롭니? 그게 벌써 언제 적인데 아직도 이래, 응? 이제 다 끝났어. 침대 밑에 기어들어가 발로 걷어차이던 그때는 이제 아득할 만큼 예전일이 됐어.


   그러니 괜찮아지자. 살고 싶어서 살자. 그러고 싶어서 부단했던 삶이잖아. 얼마나 열심히 살아냈어, 안 그래?




   그래도 나는 그래.


   여전히 죽고 싶고, 여전히 이렇게 지내.

   부단한 시간을 견뎌온 나들에게 참 미안하지만

   하나도 괜찮아지지 않았어.




   오늘도 나는,

   죽음과 밤과 어둠에 사투 중이다.


   살고 싶어서 살아있는 게 아니고, 그냥 살아 있다. 죽지 않았으니 산다. 아쉬워서 사는 게 아니라, 정말 그냥 흘러가서 산다.


   어느 날에야 살아 있음이 기쁠까.

   어느 틈에 갑자기 그렇게 됐음 좋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세상에서 가장 살고픈 사람이 됐음 좋겠다.


   살고 싶어서 살고 싶다.

   그냥 사는 거 말고,

   살아 있어서 숨 쉬는 거 아니고,

   그렇게 아쉽게 살고 싶다.



   하지만,

   죽음과 어둠과 밤과 사투하던 내가 혹여나 약해질지 모르니, 6개월에 한 번은 유서를 쓴다. 전해지지 않길 가득 바라며, 진심을 꾸욱 눌러 담는다.


   당신들은 결코 나를 지키지 못한 게 아니니, 죄책감은 느끼지 않으셔도 된다. 나는 할 만큼 다 해보고 가는 것이니 그리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된다. 사는 동안 감사했다. 덕분에 이렇게 하루 더 숨 쉬었다 간다. 되도록이면 얼른 잊으시고 되는대로 당장 행복하셔라. 나의 죽음에 그리 많은 눈물을 흘리지 말아 주시라. 내 몫에 대한 책임은 느끼지 마시고 언제나 사랑과 가까이 지내시라, 유유히 행복 근처로만 다니시라.



   오늘, 새 유서를 썼다. 다음 유서는 여름즈음 쓸 텐데, 그때까지 내가 모쪼록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이 유서도 폐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에 쓴 글이다. 힘껏, 힘닿는 데까지 해서 꼭 이겨내고 싶다.


   꼭,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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