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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수 Jan 18. 2024

섹스, 사랑의 언어인가.

내 삶에서 성적 쾌락이 차지하는 비중은 단연 낮다.

정확히는 '섹스'가 그렇다.

솔직히 말해서 평생 섹스없이 살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지금 n년째 애인없이 살고 있으며, 당연히 성관계도 없었다.


애인이 있을 때도 성관계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내게는 섹스가 사랑의 언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터라,

내 쪽에서 먼저 몸이 달아오른다든가 하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친한친구 그녀는,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데 벌써 오십 명이 넘는 남자와 잤다.

어제, 그제, 오늘, 그저께, 내일 잔 남자가 다 달랐던 적도 있었다.

그녀의 썰들은 언제나 자극적이고 흥미로웠다.

나와 다른 삶, 다른 가치관, 다른 섹스들.


그러나 그녀의 성생활을 결코 문란하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그녀와 내가 아주 다른 것일 뿐이니까.



언제가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너에게 섹스는 사랑의 언어야?"


사실은 답을 정해놓고 물은 질문이었다. "섹스가 참 쉽더라"는 그녀에게 "사랑의 언어야."라는 답이 돌아올 리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섹스는 쾌락의 수단이지만 사랑의 언어기도 하다고 했다.


그녀는 쾌락만 쫓는 섹스, 사랑이 결여된 섹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했다. 저를 아무리 예쁘게 보더라도 '눈'으로 그렇게 봐주는 것과 '마음'으로 그렇게 봐주는 것에서 오는 차이가 크다고 말이다.


그럼, 그렇게 사랑없이 하는 섹스에서는 외로움을 느끼냐, 하니 그건 아니지만 '사랑이 포함된 섹스'를 할 때 가장 좋다고 했다. 쾌락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섹스에는 사랑이 있어야 가장 완벽하다고.


나는 또 물었다.


"그럼, 사랑없는 섹스를 해왔던 이유는 뭐야?"


사랑이 있어야만 충만해지는 게 섹스라면, 사랑하는 이와만 하면 될 일인데 어째서 그렇게만 해오지 않았던 걸까. 내가 알기론 그녀와 정식으로 사귄 사람은 고작 두 명 정도다. 그 중에서도 정말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단 한 명 뿐이었다.


그녀가 답했다.

"그래도, 섹스는 좋으니까."


아, 그렇구나. 그게 사랑이 있을 때 완벽해지는 거지 없다고 해서 별로인 건 또 아니었던 거다.







어려서부터 나는 꼭 섹스를 해보고 싶었다. 그건 호기심에서가 아니고, 누군가를 절실히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그게 얼마나 좋으면,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참지 못하고 저질러 버리는 걸까?


내가 옆 방에 있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귀를 막고 입으로 아- 소리를 내며 두 남녀의 더러운 신음으로부터 도망쳤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어려서 이해를 못하는 걸꺼야. 어린 나의 눈에는 섹스가 저렇게 잔인해보이지만 어른들 세상에서는 그게 아닐지 몰라.


눈에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면서도, 두 귀를 막은 손이 덜덜 떨리면서도, 나는 그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정확히는 내가 상처받을 상황에 놓여있지 않음을 확인 받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어른이 되고 섹스를 해보니 그게 아니었던 거다.

그렇게까지 못 참아가면서 할 건 아니었던 거다.


나는 만약,

어린 아이가 옆 방에 있으면,

그게 내 자식이라면,

내가 내 배우자와 관계를 하는 게 아니라면,

그 자식이 들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절대,

어린아이에게 .. 아니다. 여기까지만 쓰겠다.

더 쓰기에는 내가 아직 이 상처를 마주할 준비가 덜 되었다.





나는 오히려 섹스를 하고 나서부터 섹스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내가 겪었던 일이 결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을 깨달아버렸기 때문이고,

그 어린 내가 구석에 쭈그려앉아 덜덜 떨며 느꼈던 공포가 정말 잔인했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섹스가 또 그렇게까지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 쾌락이 아무리 컸다한들 저 위의 상황에서까지 할 짓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그들은 이까짓 쾌락 때문에,

고작 이정도의 쾌락을 느끼자고,

나를 그 공포에 떨게 했구나.

정말 잔인한 사람들이었네.



하지만 남자친구들에게는 털어놓은 적이 없다.

혹시나라도 눈치를 챈다 해도, 절대로 내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음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나를 배려할 것이고,

그 배려를 받을 때마다,

그날이 생각날 것 같다.



내게 섹스는 사랑의 언어다. 그 이상의 의미는 결코 없다.

너를 사랑하기에 너와 자는 것이고, 평범한 연애를 하고 싶어서 침대 위에 오르는 것일 뿐이다.

나도 안다. 이게 정상은 아니지.

해야 해서 하는 거지, 정상처럼 보이고 싶어서 해왔던 거지.

사랑의 언어, 라는 예쁜 말로 포장을 해봤는데 그냥 의무감이다.


사실은 어마어마한 신념때문에 애인아닌 남자랑 자지 못하는 게 아니고,

대단한 도덕관념 때문에 이렇게 지내는 게 아니다.





나도 정상적으로 살고 싶다.

내 친구 그녀처럼 자유롭게 사랑도 하고 섹스도 하고 그러고 싶다.

잘 모르는 남들의 눈에는 애인아닌 남자와 자는 그녀가 비정상 같고, 애인하고만 자는 내가 정상같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가 정상이고, 내가 비정상이다.


마음을 다치는 일은, 사람을 참 후지게 한다.

어려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하나씩 잘 극복해나가고 있는데

가끔 이렇게 내 의지에 따라주지 않는 일들이 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그들과 침대 위에 오를 때에도,

나를 학대했던 그 남자의 얼굴이 겹쳐보일 때가 있다.


아, 오늘은 이만 말을 줄이겠다.

다음에 내가 조금 더 마음의 여유가 생겼을 때 그날의 일들도 차근히 풀어보도록 하겠다.








섹스를 자유로이 하는 그녀에게 최근 남자친구가 생겼다.


나는 또 물었다.

"사랑하는 남자랑 하니까 좋아? 예전이 그립지는 않아?"

그녀가 답했다.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섹스는 최고야."



언젠가 나도 꼭 그렇게 말하고 싶다.

모든 걸 다 극복할만큼, 나의 상처들이 종잇장처럼 가벼워질만큼

그렇게 사랑할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럼 그 사람과는 의무감에 하는 섹스가 아닌 정말 사랑의 언어로서의 섹스를 할 수 있으려나.


그러면 좋겠다.

나는 그런 날의 당신과 나를 맞이하기 위해 오늘도 글을 쓰고, 반성을 하고, 다짐도 한다.

더 나아질 내일을 위해 그날의 상처를 구태여 꺼내보기도 한다.


응, 꼭 그렇게 될 거야.

나는 그때 그 사람들과 달리,

아주 좋은 어른으로 크고 있으니까.


꼭, 그럴 거야.

나는 이미 꽤 좋은 어른으로 자란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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