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지수 Jan 25. 2024

짧은 글 모음1


스물다섯의 봄


그 해 봄의 부제를 지으며 생각했어요.

참 현란했는데, 분명 찬란했는데… 그런데도 나는 매일 밤 심란했어요.

맞아요. 사실은 혼란스러웠고 늘 험란했어요.

그 모든 걸 당신 하나가 다 가능하게 하더라구요.


아, 사랑했어요.


시간이 이리 지나도 내 마음은 너무 명백하네요.

정말, 사랑했습니다.








공석


너의 빈 자리가 아직도 공석이다.


그간 비워둔 너의 자리라 생각했는데 틀렸다.

채워지지 않는 너의 자리다.








알량한 마음


사랑도 정도 미움도 그리움도 보잘 것 없다.

영원한 마음은 세상에 없나 보다.

이 알량함을 어데 둘까 하다 나는 엄마를 향하기로 했다.

그럼 그 마음들에 힘이 생겨 더는 알량하지 않게 된다.

사실은 그걸 가능하게 할 사람이 또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결혼이란걸 하게 될 것 같다.








손익


너의 그 애달픔을 다 알고도 기어이 나는 울어주지 않았다.

너는 아주 이기적인 나를 잃었지만,

나는 그토록 사랑해주던 너를 잃었으니,

내가 손해인 이별이다.


그러니 꼭 잘 살았으면 좋겠다.








처음


첫사랑, 첫이별, 첫키스, 첫월급, 첫출근, 첫눈, …

'첫'이 붙으면 뭐든 더욱 특별해진다.

그리고 그 특별함을 유달리 좋아하던 나였다.

그러나 28년쯤 살다 보니 더 이상 내게 처음인 일이 잘 없다.

다 언젠간 해봤던, 가봤던 그런 것들일 뿐.

하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싶어 매일 의미를 부여했다.

스물여덟은 처음이고, 오늘은 처음이고, 하다못해 오늘 본 이 풀 꽃과도 처음이지 않은가.

그런데 또다시 생각해 보니 굳이 의미를 부여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다.


처음이 아니면 어때.

두 번째 사랑, 세 번째 이별이면 어때. 열다섯 번째 월급이면 어떻고, 스물세 번째 눈이면 그게 눈이 아닌 건가.


처음에 집착할 필요가 뭐 있어.








설탕


단 음식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단 건 나쁜 거라고 별로 먹이질 않았었다.

그래서 스스로 밥을 챙겨 먹는 나이가 되고도 단 것엔 손이 잘 안 갔었다.

그렇게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젠장! 설탕의 맛을 알아버렸다.

잼 통에 빠져 허우적대는 벌처럼 온갖 단 것에 흥미가 생겼다.


나쁜 건 참 쉽게 물들어진다.

좋은 것엔 왜 잘 안 될까?








생채기


딱지조차 앉지 않을 만큼의 작은 상처라도 좋으니,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미세한 할큄이어도 괜찮으니,

어딘가에도 나로 인한 생채기가 있길 바랬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나는 더 작아졌고

 

외려 늘어나는 건 내 쪽의 생채기였지만.







이전 16화 6개월에 한 번씩은 유서를 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