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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수 Feb 01. 2024

나는 정지수에서, 김지수에서, 윤지수가 되었다.

  수필 에세이입니다.




  나는 97년 4월 정지수로 세상에 났다. 친아빠의 성이 '정'이었기 때문이고, 지수라는 이름이 나의 사주와 가장 맞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그리 온전하게 지켜지지 못했다.

  내 이름을 지어주신 작명가께서는 알고 계셨을까. 본인께서 지은 이름이 여기저기 정처없이 떠돌게 될줄, 어느 곳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부랑자의 이름이 될줄도.





< 1. 정지수 였던 시절 >

정지수였던 시절은 짧다. 9년 정도로, 성의 제공자인 친아빠와 함께 살던 시절에 쓰던 이름이다.


  친아빠에 대해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장면들은 하나같이 폭력적이다. 맞고 있는 엄마. 울고 있는 엄마. 그런 엄마를 씨발년이라고 부르는 아빠. 그리고 구석에 찌그러져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는 나까지.

  남들은 이런 우리집을 알았을까. 아마 전혀 몰랐을 것이다. 아빠가 교회에서는 얼마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다니셨는지. 다들 좋은 아빠 만나서 좋겠다고 그랬다. 시집 잘간 우리 엄마의 인생을 부러워나 했지, 끔찍한 그 밤들에 대해선 누구도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아빠는 돈이 참 많았다. 그때 우리집 거실에는 엄청 큰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나는 정작 별로 흥미도 없는 피아노였지만 아빠는 아니셨던 것 같다. 음대생을 집으로 불러 과외까지 시켜주셨다. 피아노에 재능이 없자 이번엔 바이올린 과외를 시켜주셨다. 그것도 늘지 않으니 다음엔 미술 전공자를 집으로 불러 그림을 배우게 하셨다. 그러면, 남들은 또 그랬다. 지수는 참 복이 많다고. 예술 학원을 집에다 차려주는 아빠를 만나 참 좋겠다고. 나는 그때부터 글이 좋았는데, 아빠는 나의 말은 들어주지 않고 보여주기 좋은 것들만 시키셨다. 사람들은 몰랐고, 엄마랑 나만 알았다.


   사람들의 평가가 영 틀린 말들은 아닌게 그때의 나는 누구나 다 별장이란 걸 갖고 있는 줄 알았다. 차도 여러 대였어서 모두가 집과 차를 당연히 두세 개쯤 소유하고 있는줄 알았다. 유치원도 시에서 가장 좋은 곳에 다녔었는데, 이제야 아는 것이지만 원비가 달에 100이 넘었다 했었다. 03년도 기준으로 달에 100이면 얼마나 비싼 곳이었는지. 호사라면 분명 호사가 맞다. 20년이 더 지난 지금도 달에 100을 쓰고 살지 못하니, 얼마나 사치스러운 삶이었던가.


   그럼에도 엄마와 나는 매순간이 불행했다. 돈? 돈 좋지, 참 좋은데. 우리는 그렇게 호사스러운 일상 속에서도 웃을 일이 잘 없었다. 그때부터 알았던 것 같다. 돈이 다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아빠는 독단적이었고 폭력적이었다. 엄마를 사람으로 존중해주지 않았다. 아빠 생일상은 매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졌다면, 엄마의 생일엔 생일이라는 언급조차 없이 지나갔다. 그때 아빠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사람들의 눈이었지, 우리가 아니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보다, 모임에 나가 자랑할 딸의 이야기가 더 중요했고.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사는가보다는, 자신의 비위가 거슬러지지 않는 게 훨씬 중요했다.


   아빠는 여차하면 손이 올라가는 비겁자였다. 아내와 아이에게 행사하는, 그것도 가장 사랑해야할 내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최악의 인간. 그럴 때면 엄마와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폭력도 아니었으니 얼른 잠잠해지길 바라는 수밖에. 밥상도 참 많이 엎으셨는데, 여덟살 쯤인가 부터는 그게 너무 익숙해져서 아빠가 화나 엎어버리기 전에 얼른 밥을 해치우곤 했다.


   정지수였던 그 시절. 별안간 어느 곳에도 흥미를 붙이지 못하던 어린 나의 유일한 취미는, 글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었다. 분홍색 일기장에 느꼈던 감정을 토로하고,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 어딘가 다행인 기분이 들었다. 엄마 말로는 내가 네살 무렵부터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고 하셨는데 아마 영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쓰고, 읽고, 끄적이고, 생각하고 나면 불안한 마음이 꽤 잦아들어갔다. 그때부터 내게 글은, 어지러운 집 안의 유일한 도피처이자, 털어놓지 못할 마음의 하나뿐인 보장처였다.


  그때의 일기가 집에 있지만, 아직도 쉬이 열어보지 못한다. 그 어린 녀석이 뭘 안다고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그렇게도 많이 적어내렸는지. 어린 내가 그 속상한 상황을 제발 몰랐으면 좋겠는데, 불행하게도 영리하게 태어나 어른들의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 왜 아빠는 주말만 되면 사라지는지. 왜 엄마는 매일 밤 외로움에 사무치는지. 이 넓은 집에, 호사스러운 반찬에, 깔끔한 마당까지 있는데 이 집의 구성원들은 죄다 엉망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가장 속상했다. 어른인 엄마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고작 유치원이나 다니는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해결은 오로지 아빠만 할 수 있었다. 아빠만 엄마를 사랑해주고, 아빠만 우리를 존중해주면 더할 것없이 행복한 집일 수 있는데. 아빠는 그러지 않았다. 밖으로만 나돌아 다녔다.


   정지수가 싫었다. 나를 도맡아 키우는 건 김씨 성을 가진 우리 엄만데, 어째서 나는 아빠와 같은 성을 공유해야 하는지. 7살 즈음, 내가 엄마에게 먼저 말했다. 엄마, 우리 나가 살면 안 될까? 아빠 같은 거 필요없으니까 당장 나가서 둘이 살자. 엄마도 아빠를 떠나고 싶었겠지만, 나도 그랬다. 아빠 같은 인간과는 살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내게 시끄럽고, 폭력적이고, 이율배반적이고, 아무튼 온갖 나쁜 단어들로 설명할 수 있는 악마같은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9살 무렵 분은 드디어 헤어지셨다. 내게는 학수고대하던 이혼이라 아빠가 사라지는 일이 전혀 속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빠는 역시나 마지막 순간에까지 컨셉을 지키셨다. 중졸인 엄마에게 단 한 푼의 위자료도 주지 않으셨고, 나도 책임지기 싫다며 고아원에 버리던지 키우던지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아빠 나이 마흔이 넘어 어렵게 낳은 유일한 외동딸이었는데, 너무 쉽게 버리시긴 했다. 나를 두고 분이 싸운다던가 하는 일도 없었다. 아빠는 이혼의 순간에 어떻게든 나를 맡지 않는 것에만 집중하셨다. 아빠에게 다른 자식이 없으니, 그의 성을 물려받은 사람은 내가 유일할 텐데. 시절 당신께 나는, 유일한 혈육이고 뭐고 간에 짐짝으로 밖에는 치부되지 않았던 듯 싶다. 서운하지 않았다. 피차일반이다. 나도 당신이 필요없고, 당신도 내가 필요없는 것일뿐.


  아빠는 당연히 양육비도 안 주셨다. 우리 모녀는 마당 있는 주택에서 나와 빛이 들지 않는 반지하 집으로 가서 살아야 했다. 엄마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이사가 조금도 속상하지 않았다. 그깟 차, 그깟 집, 그깟 것들 좀 없으면 어때. 그간 누리던 것을 다 잃었지만, 어린 나는 그것보다도 집에 악마 같은 아빠가 사라져서 너무 좋았다. 잃은 것에 속상하기보다, 더는 밥상을 엎을 사람이 없다는 게 훨씬 좋았다.


   하지만 가난은 참 쓰라린 일이더라. 20년간 주부였던 중졸인 엄마가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고작 식당 서빙 같은 뿐이지. 특히 그때는 최저시급도 맞춰주던 때가 아니었어서 엄마는 한달에 하루만 쉬고 매일 12시간씩을 일하셨는데도 달에 100만원을 겨우 받아오셨다. 이것도 이제야 생각할 있는 건데, 아마 어리숙한 엄마를 이용했지 싶다. 아무래도 100만원은 너무한 것 같다. 그렇게 단 하루 휴일이 생기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여기 저기 놀러도 다녀주셨다. 불행하다면 불행한 삶이겠지만,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빠와 으리으리한 주말을 보내던 때보다 훨씬 많이 웃었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나는 스스로 그런 세뇌를 했다. 나는 정지수가 아니다, 나는 김지수다. 정씨가 아니고 김씨다. 내 일기장을 엄마가 보셨던걸까, 한참 그런 생각을 하던 때, 엄마가 내게 그랬다. 너는 내 딸이고, 내 자식이고, 김지수라고. 세상이 뭐라고 하든 너는 나만의 딸이라고.


  9살, 나는 정지수의 이름을 버리고 엄마의 성을 따르기로 했다. 바라던 바였고, 기다리던 바였다.






<2. 김지수였던 시절.>


  엄마는 매일 일을 하셨기 때문에 나는 거의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과외는 커녕, 학교 급식비도 밀리기 일쑤라 내 앞으로 들어갈 교육비 같은 건 없었다. 2시에 하교를 하면 집에 와 책이나 봤다. 그때 학교 도서관이 4시 반쯤 닫았는데, 4시 15분까지 교문 앞에서 빌린 책을 읽고 반납한 후 다시 새책을 빌려 집으로 가곤 했다. 철이 일찍 들어 책이나 봤지, 큰 불평도 없이 잘 웃으며 지냈다.


  음, 실은 진짜 웃고 싶어서 웃은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엄마를 향해 웃어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은, 엄마가 나를 버릴까봐 무서웠다. 나는 아무래도 엄마한테 짐밖에 안 되는 것 같은데 여기서 어리광이라도 부렸다간 당장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지- 싶어서 반항할 틈도 없었다. 혼자 씻고, 밥도 차리고, 청소도 하고, 장도 봤다. 그러고 싶었다기 보다는, 그래야 했었던 것 같다.


   사실 자는 척을 하고 있었지만, 엄마가 아빠와 헤어질 때 하던 대화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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